끝내기와 복기
이종빈
인공지능과 인간의 바둑 대결에 세상의 관심이 쏟아지던 주말, 종로에서 친한 친구를 만났다. 6년을 만난 여자친구와 이별했단다. 당연히 항상 함께하리라고 여겼던 두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왜 헤어졌느냐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긴, 이유가 명확했다면 함께 해결하고도 남을 사이였다. 당연했던 것들이 점점 껄끄럽게 느껴지고, 소중한 것들이 당연해졌기에
이별이 찾아왔겠지.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었기에, "복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바둑에서 복기는, 대국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해당 대국을 다시 두었던 순서대로 두어보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대국을 연구하고 검토하게 된다. 방금 전
까지 적수였던 사람들이 승패를 떠나 서로의 발전을 위해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은 바둑 고유의 관습이다. 얼마
전 까지 사랑을 하던 사람과, 그 사랑을 응원하던 나의 또 다른 미래를 위해 바둑의 지혜를 빌려보기로
한 것이다. 끝나버린 사랑의 복기를 제대로 하자면, 그 상대가
전 여자친구여야 하겠지만.
관계를 이어나가는 동안 패착(敗着)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했던 여자친구의 미묘한 행마(行馬)는 없었는지 머리를 맞대고 따져보았다. 그러다
관계의 마지막 몇 달, 바둑으로 치면 끝내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별의
이유를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항상 정신적으로 건강하던 여자친구가 몇 달 전에 일을 관두게 되면서, 살짝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불확실하게만 보이는 현재와 미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삶 대부분의 요소들이 남자친구와의 관계와 얽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온전한 자기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흔들리는
여자친구를 좀 더 단단히 붙잡아주지 않고 손을 놓아버린 친구를 책망하려다 대신 술잔만 비웠다.
더 말을 잇지 않았던 것은, 그 순간
우리가 나누던 대화 내용이 그저 추측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둑판 위의 돌의 흐름을 온전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친구는 모든 것을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기억들이 이루는 관계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 미래에 이
연애를 다시 돌이켜 봤을 때, 또 다른 이별의 이유를 찾아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아가기 위해 현재의 시각에서 최대한의 해석을
시도하고 그 해석을 통해 좀 더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책망 대신 미래에 대한 응원과
다짐이 훨씬 의미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난 밤의 성장이
지나쳤는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출근했을 때, 정부가 인공지능 개발 컨트롤타워를 설립하려 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세돌과 알파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거워지자 급히 내 놓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현 정권의 임기가
2년도 남지 않았다. 슬슬 끝내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빈틈없는 마무리를 보여준
정권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대 이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민정부
이후에도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항상 친, 인척들의 비리, 여당의
분열 등으로 인한 레임덕 현상은 있어왔다. 복기의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새로운 정권은 항상 지난 정권에 대한 심판자를 자처하며 체제와 예산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사업을
뒤집어 엎는 데에 집중한다. 지난 정권의 당사자들은 회고록을 통해 나름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견되는 비리 연루 사실들만 들어올 뿐이다.
현 정권은 복기, 즉 반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깔끔한 끝내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정권이 ‘심판’대신 ‘정치’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이다. 다음 정권은 현 정권의 업적과 과오를 냉철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좀 더
나은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심판을 자제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로 빨리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완벽한 정권, 완벽한 정책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에서 최대한을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했다는 사실을 보고, 인공지능 연구 개발에 대해 국가가 앞장 서 지원하겠다는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쳐 바둑에 이어져 내려오는 끝내기와 복기의 정신을 본받을 생각이 우선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