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과 아가씨
강촌 정영임
내 나이 23살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영등포 신길동 그녀의 집에서 그녀는 네 살 아기였는데 첫 눈에도 하얀 얼굴이 병약해 보였다. 가끔씩 볼 때마다 아기는 늘 누워있었고 날 보면 배시시 웃기만 했다. 말이 네 살이지 말도 잘 못하고 보기에도 발육이 부진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아기를 순하다고 했다. 이 아기와 내가 그렇게 질긴 인연이 되리라곤 그때 난 정말 몰랐다. 그녀의 이름은 경미, 다음 해 아기가 다섯 살 되던 해 난 그의 큰 올케도 되었고 육남매가 있는 그 집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경미는 시어머니가 45살 되던 해에 태어났단다. 시어머니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고 사셨었는데 10년 후에 덜컥 아기가 생겼단다. 집안 어른들은 고민 고민 끝에(우리 시댁은 대대로 대단한 천주교 집안이다.) 시어머니에게 아기를 떼라고 했는데 더 대단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세상에 온 아기였다. 노산에다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아기는 잦은 병치레를 했다.
우리 친정 엄마는 대 놓고 반대를 했다. 시댁이 너무 가난한 것이 마음에 안 들어 화가 치미는 걸 겨우 참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늦둥이 딸까지 두었다니 망측스럽고 주책이라며 싫어했다. 나보고 고생문이 훤하다며 당신은 딸이 다섯이나 되어 내가 개혼(개시)을 잘 못하면 나머지 동생들 다 망친다며 나를 달래도 보았다. 사정도 했다. 욕도 했다. 급기야는 나를 끌고 골방으로 가더니 ㅎㅎㅎ 조심스레 임신 했느냐고 까지 물어봤다. 세상에 부모 이기는 자식은 없는가 보다. 날을 잡고 이러 저런 당부 끝에 아무리 아기라도 시누인 시누이니 애기씨라고 하든지 아가씨라고 불러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엄마, 걘 애기야. 무슨 아가씨 애기씨야. 그냥 경미라고 부르면 된다니까.” 엄마는 기가 막히는지 긴 한숨 끝에 "이년아! 아무리 어려도 시누인 시누인 거야!" 하며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리곤 “어휴~~우리 집 큰 년은 덩치만 크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에다 선머슴이요, 저쪽 집 작은 년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병약한 아기라니, 그 놈의 집구석 쯧쯧쯧.”하며 혀를 찼다.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은 엄마는 싸잡아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결혼식 날인 음력 10월 20일은 손돌이가 얼어 죽었다고 하는 엄청 추운 날 이라며 집에서나 시댁에서나 날씨 때문에 걱정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도우사 날씨는 우중충하고 회색빛이었지만 걱정과 달리 아주 따뜻했다. 명동 성당엔 하객들이 많이 와 주었다. 하객들은 오늘이 이름 있는 날인데 신부가 후덕하게 생겨서 날씨가 아주 따뜻하다며 축하해 주었다.
손돌 추위는 고려왕이(왕의 이름은 기록에 없음)뱃길을 통해 강화도로 피란을 할 때 뱃사공 손돌이 갑자기(물살이 빨라지게 되어) 배를 급류 쪽으로 몰자 위협을 느낀 왕이 손돌을 의심해 목을 베도록 명령을 내리자, "박을 띄우고 따라 가면 안전하게 지나 갈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데서 유래한다. 10월 20일이 되면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 또 손돌의 전설과 연관시켜 음력 10월 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을 손돌풍이라 하며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바람이 불면 배를 타지 않는다. 손돌 목은 인천시 강화도와 김포시 대곶면 사이로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은 곳이다. 10월20일은 대체로 양력11월 말이거나 12월 초에 해당하며 절기상 소설, 대설을 전후한 시기라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후 안전하게 지나간 임금은 크게 후회하고 억울하게 죽은 손돌을 기리며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그의 얼을 위로 해 주었다.
첫날 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신랑이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경미를 시누이로 보지 말고 우리가 좀 일찍 결혼해서 낳은 딸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 천방지축은 너무 민망스럽기도 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후에 그 약속이 내 목의 주홍글씨가 될 줄이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난 경미를 도저히 아가씨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에구~~아가씨가 아가씨 같아야지 웃음이 나고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불편했다. 난 그냥 “경미야, 경미야.”하고 불렀고 그런 날 그녀는 좋아했다. 그때의 신길동 골목은 아주 좁아 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었다. 내가 시댁에 가는 날이면 그녀와 난 골목을 요리 조리 구경 다니며 놀았고 골목 끝에는 처마가 아주 낮고 어두컴컴하고 허름한 구명가게가 하나 있었다. 난 그녀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나도 먹었다. 물건은 많지 않았으나 우리에겐 아주 재미있는 곳이었다. 우린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그 곳을 들락날락했다. 구멍가게 할머니는 “경미야, 경미야.” 하는 날 아주 못 마땅해했다. 그러나 우린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경미가 말을 안 듣는다고 골목에 세워 놓고 꿀밤을 먹이기도 하고 또 파란 대문 뒤에 숨어 있으면 놀란 경미가 언니, 언니, 큰 언니 하고 부르며 울었다. 그때 짜~잔 하고 나타나면 경미는 눈물을 닦으며 내게 달려왔고 우린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의 호출이 있었다. 오늘은 가서 경미와 무얼 하고 놀까 생각하고 갔는데 어머니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낮은 어조로 조용히 동네 어른들이 내가 경미에게 아가씨라고 안 부른다고 수군수군하니 이제부터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그동안 우리 어머니는 별 말씀이 없으셔서 통과 된 줄 알았는데 할 수 없어 약속은 했지만 아무리 아가씨라고 부르려 해도 불러지지 않았다.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것처럼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내 몸이 스멀스멀 하는 것 같아 결국 어른이나 동네 사람들이 있으면 부르지 않고 적당히 눈짓으로 말했고 우리끼리 있으면 “경미야, 경미야.”하고 불렀다. 세월이 가고 조카들이 생기니 자연스레 경미는 작은 고모가 되어 있었다.
세월은 그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일들이 많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 무심히 흐르고 흘러 어느 새 경미는 50이 넘었고 난 아직도 천방지축을 떼어내지 못한 채 70을 바라본다. 경미는 내게 아가씨 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난 또 무엇이 그리 쑥스러워 아가씨라고 불러주지 못했을까? 어느 날, 내 안의 천방지축과 영원히 헤어지는 그 때쯤엔 경미가 아닌 아가씨로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것들도 추억이 되어가고 있고 어느새 두 사람의 머리위에도 세월의 흔적이 미소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