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버튼을 눌러라
이삼 년만 있을 작정이었다. 아이들 영어도 쉽게 가르치고 여행이나 실컷 하자며 트렁크 몇 개만 들고 왔다. 이민이 아니었기에 생계에 대한 아무 계획도 없었고 ‘우리는 휴식이 필요해~~’ 하며 기후 좋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 나성에 온것이다. 생활은 퇴직금과 양가의 전별금, 한국집 전세금이자등으로 충당하리라 생각했지만, 6개월도 안되어 터진 IMF사태로 고환율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이란 속담이 너무 실감 났다. 고지식한 우리 부부는 학생신분에 불법으로 일한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꾸었다. 절약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송금에만 의존해 사느라 남모르는 주눅이 들어, 미국에서 수입 있는 사람이 부럽기만 했다. 일가 친척 하나없는 타지에서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자립하고 싶은 마음에 지금하고 있는 뷰티 서플라이를 인수했다. 드디어 아침에 출근 할 곳이 생겼을 때 너무 기뻤다. 나는 주로 점원과 함께 물건 정리와 판매를 맡고 남편은 물건 주문을 한다. 내가 주문한 것이 잘 안 팔리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초창기에 아예 그렇게 정했다. 부부가 같이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다툼이 생긴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 터라 서로 역할 분담을 한 것이다. 손님층이 흑인, 히스패닉, 백인, 아시아인 혼합지역이라 물건 종류 수가 정말 많다. 매일같이 수많은 신제품이 출시되니 10년이 넘어가는 데도 물건을 다 알 수가 없다. 각종 염색약, 샴푸, 린스, 스타일링제품이 인종마다 다르다. 화장품, 파마약,향수외에 고대기, 드라이어, 바리캉등의 전기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그외 다양한 가발과 붙임머리, 패션악세사리, 구두, 모자등 여성을 꾸미는 것이라면 옷을 제외하고 다 있다.
초기에는 상품공부를 열심히 했다. 사전을 찾아가며 설명서를 읽었다. 각종 뷰티쇼에 참가하여 새로운 정보를 듣고 주일에는 다른 뷰티서플라이를 순례하며 물건 진열법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옷가게도 돌면서 응용할것을 찾곤 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선반의 먼지를 털고 샴푸 병 하나라도 라벨이 똑바로 안보이면 줄맞추어 바로 놓고 마네킹의 가발 위치도 수시로 바꾸어 주면서 변화를 주었다. 찾는 물건이 없으면 꼭 메모해 두었다가 구해서 연락해주고 내 적성이 장사였나 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다.
염색약을 고르면서 헤어샘플 스와치를 꿈꾸듯 그윽이 바라보는 손님을 보면 나도 덩달아 그녀들의 변화된 머리카락색을 그리며 행복해진다. 암환자의 가발을 고르며 딱 어울리는 것을 마침내 찾아냈을 때 정말 기쁘다. 아름다움을 판매하는 뷰티서플라이 업종에 긍지를 느낀다. 익숙해진 일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인가보다. 마침 불어닥친 불경기 핑계도 있으나 다운타운에 나가서 물건을 직접보고 구매하던것에서 카탈로그만 보고 오더하여 배달 받는 일의 빈도수가 늘어간다. 나도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로 책가방만 들고 왔다갔다 할 뿐 가게일은 뒷전이었음을 고백한다.
연휴 여행길에 모하비사막을 지나며 죠슈아트리를 보았다. 물 한 방울을 얻기위해 땅속 13미터까지 뿌리를 뻗는다고 한다. 이민 1세로서 자손들에게 큰 그늘을 줄 수 있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위해 얼마만큼의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죠슈아트리를 보면서 반성한다. 척박한 사막같이 힘든 불황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기억하고 리셋 버튼을 누르며 초심으로 돌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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