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麻衣太子)의 혼을 찾아서
노희상/한국문학사랑신문 주간
나는 9년 전 여름, 속초를 향해 차를 몰고 가다가 강원도 인제에서 ‘다물교’라는 낯선 표지판을 만났다.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차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삼거리 모퉁이에 검은 비석이 보여서 가보았다. 아, 마의태자유적비(麻衣太子遺蹟碑)라고 쓰여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마의태자라면 신라 경순왕의 태자, 금강산에서 베옷 입고 풀뿌리 캐 먹다가 죽었다는 비운의 왕자인데, 그의 유적이 이곳에 있다고? 경주가 아니고 왜 강원도 인제에 있다는 말인가? 혹시 신라 태자의 전설이 이곳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쭈뼛할 만큼 전율을 느꼈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유적비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들어갔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제군 상남면이었다. 조금 들어가니 ‘김부대왕로’라는 도로명이 나왔다. 김부(金傅)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뒤 여기를 다녀갔거나 아니면 이곳에 사는 신라 유민들이 그의 삶을 애석해하여 동네를 만들고 길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도 모른다. 더 들어가니 좁은 계곡에 소리치며 흐르는 세찬 물길 위로 작은 다물교가 여러 개 있고, 다물농장이니 다물피정센터니 하는 시설이 나타났다. 농장 앞에서 만난 주민은 이곳의 옛 이름이 다물리라 말했다.
다물의 의미는 뭘까? 사료를 찾아보니 옛말에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는다는 뜻’이라 했고, 고구려 주몽이 단군조선의 옛땅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다물’을 고구려의 연호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기야 이곳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 동예(東濊)라는 나라를 세워 살았던 곳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었다. 신라와 실직성(삼척)에서 싸웠던 그 족속 말이다. 아무튼,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지역이라 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는 것 같아, 역사의 전승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황량한 계곡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군사훈련장>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장갑차 한 대가 내 차를 가로막았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라는 것이다. 나는 역사연구가라고 말하고 잠시만 둘러보고 나오겠노라고 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때 한 장교가 지형 설명을 해주면서 좌측 방으로 100미터만 들어가면 마의태자 전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뛰다시피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아! 뜻밖의 장소에 말끔한 비석이 서너 개가 서 있는데, 풍천김씨와 부안김씨가 마의태자 후손임을 내세우며 세운 비석이었다. 비 옆에는 대왕각(大王閣)이라는 현판을 단, 작고 퇴락한 기와지붕의 전각이 열쇠가 채워진 채 서 있었다. 대왕각이라니, 이곳에 김부대왕 즉 경순왕의 신위를 모셨다는 말인가? 아니면 마의태자가 부왕의 뒤를 이어 김부대왕이라 불렸다는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낡고 작은 석탑이 철제 보호막 안에 있었다. 마의태자 5층 석탑이라 했다. 그 장교는 이곳이 갑둔리이며, 마의태자 군이 주둔해있던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그길로 차를 몰고 나가니 상남면사무소가 나왔다. 면사무소 앞의 가게에 들러, 나이 80이 넘으신 어르신에게서 동네 유래를 들었다.
“여기는 금부대왕이 다녀가신 마을이래요. 옛날에 신라 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았다고 해요. 수십 년간 신라왕이 여기서 왕 노릇 했대요.”
어르신의 말이 맞았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태자 김일이 이에 강하게 항의하고 신라 부흥군과 함께 강원도 인제로 들어왔던 것이다. 즉 태자 김일이 이끄는 3000여명의 화랑과 신라 백성들은 충주 하늘재를 넘어 북상하여 양평에 도착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수려한 이곳에서 신라 부흥을 도모하고자 용문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용문사에 들러 태자가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 수령(樹齡)이 지금 천년을 넘겼다고 하니 역사의 나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개경과 너무 가까워 충돌이 생길까 두려워서 인제의 오대산 자락에 터를 잡은 것이었다. 김일 태자는 신라인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이른바 ‘금부왕국’을 세우고 20여 년간 개경 정부에 대항하다가 아버지 경순왕이 죽은 뒤 고려 광군에게 한계산성에서 패하고 금강산으로 넘어갔다.
그 후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하다가 비로봉 아래에서 병으로 죽었고, 그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는 사라지지 않고 대륙에서 부활했다는 주장이 청나라의 건륭황제에 의해 주장되었다. 고려에 항거했던 신라인들은 금강산 일대에서 소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건륭황제가 직접 감수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는 청의 황실은 신라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금강산으로 이주한 신라 유민 중에 상당수가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그때 북만주는 무주공산이었다. 뒤이어 고려군이 선춘령(길림성 돈화)까지 추격하자 흑룡강성 아성으로 건너가 여진족과 결합하여 그 후손 중에 아골타가 나타나 11세기에 금나라를 세웠고, 나중에 후금(청)이 이를 이었으니 청의 황족은 신라 왕족이라는 얘기이다. <금사(金史)>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강화도 마리산 아래 개천각(開天閣)에 금태조 아골타가 한민족의 지도자로 모셔져 있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규명해보고자 만주를 수십 번 답사하였지만 이미 오래된 일이고,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해 버려서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요령성 본계시(本溪市) 부근에 신라 박 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고, 요령성 안에 다섯 개의 박가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분을 만나 물어보니 자기 조상은 고려에서 왔다고 하는데, 신라를 이은 나라가 고려라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도 박(朴) 씨는 조선인 특유의 성씨라고 한다. 지금 중국에 사는 박 씨는 장보고가 세운 신라방 출신이 현지에 정착한 경우이거나, 청나라에 끌려갔거나,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따라 명나라와 싸우지 않고 투항하여 정착한 조선인이 아닐까 싶다. 다만 조선족 중에 박 씨는 조선조 말 흉년을 피해 만주로 넘어간 사람들, 일제 강점기에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1915 가을, 나는 만주 심양 북릉공원에 있는 청 태종의 동상 동판에서 ‘애신각라 황태극(愛新覺羅 黃太極)’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애신각라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이면서 만주어로는 김씨(金氏)를 말한다. 그러니까 ‘김 황태극’의 동상이라는 표지였다. 청 황실의 성씨는 누르하치에서 푸이까지 ‘신라 김씨’였는데, 중국은 이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청 태종의 무덤 앞의 재실(齋室)에서 신라 금관 모형을 한 사슴뿔 모양의 향로를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다. ‘여기가 신라인가’라는 의문이 기분 좋게 들었다.
귀국 후 나는 경순왕의 발자국을 살펴보았다. 지금 판문점 부근의 도라산 전망대는 개경으로 간 경순왕이 늘 서라벌 고향 땅을 그리워한 곳이다. ‘경주사심관’이라는 직책을 받았지만, 생전에 한 번도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도라산에 올라 남쪽을 돌아보았다 해서 도라산이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경순왕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 건너 큰 개울가에 있었다. 비석은 6·25 때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나 있고, 적적하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또 군부대의 탄약고가 무덤 가까이 있어 불경스러웠다. ‘경주사심관’이라면서 사후에도 고향으로 안 보내고 개경 가까이 무덤을 쓴 이유는 고려가 신라왕국의 부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한 가지,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넘긴 죄인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여 당시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군주는 아니었을까? 후백제의 공격이 연이으고 도둑이 들끓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나라 형편에 군사를 동원하고 전쟁했더라면 신흥 고려에 이길 수 있었을까? 지금의 시각으로 경순왕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비난만 하지 말자는 말이다.
어찌 됐든 경순왕은 8년간 통일신라를 이끈 대왕이다. 그런 그의 무덤을 임진강 너머 풀숲에 버려둬서야 되겠는가 싶다. 신라 혼의 부활을 위해, 또 내부의 혼란으로 나라를 남에게 넘기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제라도 경순왕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라도 경주에 세우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닐까 싶다. 경순왕은 우리 역사상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손국(遜國)을 하신 최초의 지도자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