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비행
진연후
하얀 공간을 배경으로 글라이더에 매달린 뒷모습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듯하다. 커다란 천 하나와 그에 달린 수십 개의 끈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 있는 모습. 내게는 비타민C 몇 알쯤 되는 사진이다.
새로운 달력을 걸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열두 달을 계획하는 건 1월이지만, 혹 어이없이 1~2월이 지난다고 해도 또 다른 시작으로 봄이 있다. 봄은 십수 년간 학생신분이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은 새로운 시작의 시간일 것이다. 시작은 매듭하나 없는 타래여야 하는데 난 마구 엉키어 있는 실꾸러미마냥 봄이 어지럽다. 좋아하는 가을,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은 언제나 어수선하고 무기력해지는 시간이다.
패러글라이딩을 배우러 다녔다. 매주 일요일 아침, 휴일 보내기에 대한 생각 하나쯤은 비슷한 사람들과 승합차를 타고 원주로 향했다. 영동고속도로를 지나며 보았던 하얀 싸리꽃이 봄의 멀미를 조금쯤 가라앉혀 주었다. 두 발을 땅에서 떼어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주간 지상훈련을 받고 처음으로 산에 올라가던 날, 하늘은 너무도 별일없이 맑아서 불안했고 바람까지도 그날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무게가 30킬로그램인 글라이더를 메고 산에 오를 때는 따뜻한 햇살이 내게도 봄은 시작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륙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순간, 내 마음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내 몸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님을 안타까워했다.
글라이더를 고르게 펴놓고 줄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고르고 앞가슴에 무전기를 차고 헬멧을 푹 눌러쓰고 심호흡을 한다. 조교가 큰 소리로 자신 있느냐고 묻는다. 크게 대답해야 하는데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양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 떨림이 너무 심해지자 도전하겠느냐 아니면 포기 하겠느냐고 다시 묻는다. 뒷사람들에게 몇 번 순서를 바꿔 주고 마음을 다잡아 다시 장비점검을 한다. 너무 불안해 보이는지 조교가 용기를 준다. 지상 훈련때처럼 하면 된다고, 잘 하지 않았느냐고, 바람도 좋으니 걱정하지 말고 배운 그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용기라든가 도전의식은 그리 쉽게 내게 발생되지 않는다. 그대로 한번쯤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에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하나, 둘, 셋."
"뛰어, 계속 뛰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힘을 다해 뛰었다. 순간 열심히 뛰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위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당기는 그 느낌. 그 울렁거림은 환희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줄 놓고, 자세 잡고...... ."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지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 초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마음속으로 '그래, 해냈어. 배운 대로 방향 잡고 저쯤에서 착륙하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어.'라고 주문을 외운다. 착륙장에서 뭔가 지시를 하는 모양이다. 맙소사, 무전기를 켜 놓지 않았구나. 어쩌지? 갑자기 무서워진다. 나 혼자 내팽겨쳐진 기분이다. 주위엔 지나가는 바람뿐이다.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은 저 아래 아주 조그맣게 보이고, 그대로 다가가서는 안 될 울창한 나무들이 두렵기만 하다. 혹 지시사항을 거부하고 멋대로 한다고 생각할 지 도 몰라 소리친다.
"안 들려요. 하나도 안 들려요."
나중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안 들려요" 하던 것을 흉내들 내며 웃었지만, 그 땐 걱정을 많이 했단다. 겁이 많아 불안한데 무전기까지 안 되었으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살살 잘 불어주고 계속 손짓으로 착륙지점으로 유도해 준 분들 덕택에 살포시 내렸다. 착륙연습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했던지 정말 배운 대로 넘어지지도 않고 내려앉았다.
처녀비행. 1996년 4월 28일. 비행 수첩에 확인도장을 받았다.
파란 하늘에 색색의 패러가 조용히 떠있는 모습은 정말 황홀하다. 그렇게 떠 있던 순간이 있었기에 지금은 가끔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작은 세상이 조용하기만 하다. 그 순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자연에 날 맡기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동안 바람이 조금만 심술을 부려도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 착륙장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산 너머로 넘어가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나무에 조용히 걸칠 수만 있어도.
그 뒤로 몇 차례 더 원주 치악산 근처 이륙장에 올랐고 매번 실수 없이 하늘에 떴다가 조용히 숨 한 번 고르고 내려왔다. 가르쳐 주는 분들 말씀이 나무에도 걸치고 착륙 실패도 해야 더 자신감이 붙는데, 난 너무 얌전히 비해을 해서 늘지 않는단다. 내가 생각해도 매번 긴장이 똑같으니 계속 즐기면서 할 수는 없겠다싶어 패러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았다.
혼자 떠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엉뚱한 곳에 떨어지면 여러 사람이 연장을 들고 뛰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잠시 느끼는 황홀한 자유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무거운 글라이더를 메고 힘들게 올라갔다가도 바람이 좋지 않으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배웠다. 때에 따라 접을 줄도 아는 것이 용기라는 것. 무심해 보이는 뒷모습에 감추어진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긴장이 일상의 어지러움을 가볍게 날려 보낸 봄이었다. 지나고나니 현기증은 가라앉고 소중한 느낌만 남아 있다.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다지만 분명 난 하늘을 날았고 그 느낌을 소중하게 꺼내본다.
때때로 시작이라든가 출발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는 계절이면 미리 버겁다. 아직까지는 약효가 남아있는 사진 한장으로 이 봄을 풀어갈 수 있을지, 아님 비행(?) 처녀라도 되어야 할지.
책과 인생. 200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