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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다, 주름아!    
글쓴이 : 진연후    23-07-25 12:27    조회 : 1,152

반갑다, 주름아!

진연후

희미하지만 분명 주름이다. 노안은 근시용 안경이 영 귀찮다.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벗는다. , 보인다. 붉은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발등 위에 가느다란 실선이 몇 줄 기어가고 있다. 꿈틀거린다.

일요일 아침 450, 알람을 끄고 5분쯤 뒤척인다. , 일어나야지. 생각뿐이다. 내 몸인데 이 불편한 느낌은 뭐지? 순간 일어나려는 몸에 무의식적인 힘의 분산이 이루어지며 오른발이 주춤한다. 엄지발가락 부근에 나타난 붉은 점이 불안한 기운을 풍긴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다. 수박씨만 하던 점은 서너 시간 후 제법 큰 토마토가 되어 있다. 게다가 아직 진행형이다.

어느 날 아침,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전날까지 자신이 누렸던 모든 일상이 언제쯤 그리웠을까? 그는 당황하는 중에 결근을 걱정하고 가족의 반응을 헤아린다. 휴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 나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은 멀쩡한 왼발과 두 팔을 향해 웃어줄 수 있다.

다음날 절뚝거리며 병원을 찾았다. 균이 침입한 것 같단다. 밤새 누가 내 발등에 균을 심었을까? 2주 동안 항생제를 먹었더니 통증은 가라앉았는데 검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 시작이었다. 다음엔 왼발 안쪽, 다시 오른발 복숭아뼈 부근. 몇 개월째 대략 2주 간격으로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위치를 바꾸었다. 혹시나 해서 피 검사를 했지만 요산 수치는 높지 않다. 의사는 통풍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는데 원인을 모른다는 건 전혀 다행스럽지 않다. 소염진통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으면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종아리를 거쳐 무릎까지 여기저기 붉게 부어오르는 것만큼 불안도 점점 부풀어 오른다. 절뚝거리거나 뭉그적거리며 그런대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만도 감사한 일이라고 애써 달래본다. 

걷기를 좋아했던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전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했다는데, 지금 나는 그저 걷는 행위가 그립다. 생각 없이 무작정 걷기가 좋았다. 지하철 혹은 버스를 타고 가다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서 걷기도 하고, 트레킹이란 이름으로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던 때도 있었다. 생활에 변화가 있거나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면 길을 나서곤 했다. 마음이 시끄러울 땐 혼자 산을 찾아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들을 달래기도 하고, 수년 동안 원주에서 열리는 국제 걷기 대회에 참여하며 새로운 인연을 맺기도 하는 등 함께 걷는 즐거움을 누린 적도 있다.

일어서서 한 발짝 떼는 것에 울컥한 적이 있다. 방송인 이휘재의 쌍둥이 아들이 나온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텔레비전 프로에서 이휘재가 쌍둥이 중 한 명을 업고 다른 곳을 보는 사이 다른 아기가 소파를 짚고 일어서는 장면이었다. 그동안 기다가 뒤집기도 하고 상체를 들어올리기도 하더니 혼자서 소파를 짚고 두 발에 힘을 주고 일어선 것이다. 혼자서 두 발로 선다는 행위가 왜 그리 울컥하던지. 두 발이 온몸을 지탱하고 서는 순간, 삶이 시작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다양한 치료 방법을 시도해본다. 느닷없이 증상이 시작된 건 아닐 것이다. 이미 안에서 이상이 있었을 테니 그리 쉽사리 사라지겠는가 싶다. 경제활동을 그만두고,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일에 시간을 쓴다. 온종일 발, 종아리, 무릎에 얼음찜질을 하고 어루만져주며 말을 건다. 예쁜 다리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동안 고마운 줄도 모르고 욕구에 끌려서 지쳐가는 너를 챙기지 못해 미안해.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햇살이 거실 끝에 닿았다. 스트레칭이라도 해볼까. 다리를 펴는데, 아 저건. 안경을 벗고 발을 당겨 가까이 본다. 희미하지만 분명 주름이다. 아직 검붉은 기운은 남아 있지만 붓기가 빠진 것이 확실하다. , 발등에도 주름이 있었구나. 발등 주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눈주름이 따스한 이도 있고, 입가 주름이 넉넉한 이도 있다. 이제 나는 발등 주름을 자랑할까 보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을 생각한다. 실존을 지향하는 인간의 가장 상징적인 행위가걷기라고 했던가. 나도 이제 운동화를 신을 수 있다. 운동화를 신고 어디부터 걸어볼까? 송파 둘레길에서 두 팔을 휘저으며 걸어도 좋겠다. 위례 중앙로 서점에서 세월아 네월아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코스도 완벽하다. 이 기분을 날아갈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걸을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반갑다 주름아!

 


한국산문 20233월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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