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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일 아니다.    
글쓴이 : 진연후    24-03-21 16:25    조회 : 725

별일 아니다

                                                                                  진연후

 

 

어색하다. 거울 속 참 낯설다. 외출 전 거울을 이렇게 오랫동안 본 적이 있었던가? 화장이라고는 스킨로션에 선크림 정도였으니 외출 준비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은 일이 분이면 충분했는데, 찰랑찰랑 윤기 나는 머리는 보고 또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불안하다. 현관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온 감각이 머리에 쏠린다. 봄바람은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옛 동료 같다. 벗겨질 염려가 없는데도 손은 자꾸만 이마 언저리에서 우왕좌왕, 눈은 사람들 머리에 붙잡혀 있다. 아니, 머리카락만 보인다. 저 정도이면 머리숱이 좀 많은 편에 속하겠군. 파마를 한 걸까, 본래 머리카락이 저 정도로 윤기가 나는 직모인 걸까? 부러운 중에 답답하다. 신경이 온통 머리에 가 있어서 그런지 갑자기 두피가 근질근질하다. 남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살짝 손가락으로 긁적이고 싶다. 좌우를 살피고 왼손 검지로 꾹 누른다.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낫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근질거린다. 손가락 세 개로 꾹꾹 누르기를 반복한다. , 벗고 싶다.

몇 달 전 염색하러 갔다가 다운 펌이라는 걸 추천하길래 함께 했다. 아주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불만도 없었다. 그동안 해왔던 볼륨 매직보다 살짝 덜 펴진 것 같긴 했지만, 곱슬머리가 좀 덜 표나니 그걸로 되었다 싶었다. 그리고 다시 다운 펌과 염색을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약간 아쉬웠다며 이번에는 좀 더 강한 걸로 확실하게 펴 주겠다는 원장님의 목표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색깔도 모양도 이대로라면, 주말 모임에서 들을 인사에 미리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머리가 -가려움과 간질거림 사이?- 스멀스멀한 느낌, 왼손을 쓱 넣어 두피를 두어 번 두드리는데 싸~하다. 뭔가 잡히는데 잡으면 안 될 것 같은 순간, 눈은 이미 손가락 사이사이 빼곡한 머리카락을 보고야 말았다. 움직이는 대로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술술 빠진다, 아니 툭툭 떨어진다. 순식간에 수북이 쌓인다. 미용실에서 머리숱을 칠 때면 다른 사람 두 배는 된다며 웃었는데, 거실 바닥과 욕실에 쏟아져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내가 얼마나 머리숱이 많았는지 실감한다. 머리에서 전해오는 휑한 기운에 차마 거울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빠지면 내일쯤엔 남아 있는 것이 있긴 할까? 머리를 감을 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싶지도 않은 채, 머리에 손을 대는 것조차 불안하다. 두려운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빨라진 호흡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잠시 심호흡을 한다. 내가 두려운 건 뭘까? 무엇을 잃을까 염려하는 걸까?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뿐인데. 아무런 고통이 없는데 불안한 것은 어쩌면 막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파마의 약이 세서 그런 것일 뿐, 머리카락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라날 것이다. 사실을 정리하고 나니 별일 아니다.

미용실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가발을 쓰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곱슬머리는 아침마다 유전자 투정을 하게 했고, 두발 자율화가 있기 전 가을소풍 사진을 삭제하고 싶게 만들었다. 곱슬머리를 펴고 싶어 많은 시간과 돈을 썼지만, 찰랑찰랑 긴 생머리는 로망일 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발을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십 대 삼십 대를 지나면서 한 번도 실행하지는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잊고 있던 소원이 이렇게 어이없이 이루어지다니.

 

첫날은 가발 덕에 주목받을까 싶어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이 긴장되었다. 하지만 남들은 내 머리카락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걸 안다. 내 머리카락의 특성을 아는 지인들이 좀 놀라긴 했다. 어떻게 머리카락이 쫙 펴졌냐고, 머리카락 윤기가 장난 아니라며 얼마짜리냐고. 그리고는 파마로 이렇게까지 가능한가 의아해한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가발임을 실토한다.

여기저기서 머리카락이 빨리, 많이 자라는 방법을 알아봐 주겠단다. 헤어용품은 물론이고 머리가 빨리 자라는 음식에 두피 운동까지 갖가지 비법이 난무했다. 야한(?) 생각을 하면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는 설이 있다며 추천하는 이들은 의미 모를 표정으로 쑥스러워한다. 밤마다 빨간 표지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어야 할까? 누가 뭐래도 가장 확실한 비법, 내가 믿는 건시간이다.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 자란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란 얼마나 다행인가!

오랫동안 여기저기 아파서 두려움과 불안 속에 지내다 보니 혼잣말이 많아졌다. 자려고 누워 두어 번 뒤척이다가 슬며시 침을 삼켜본다. ,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면서 두 발과 다리를 움직여본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한마디 한다. 별일 없네, 감사합니다. 음식을 씹고, 양치질이 자연스러울 땐 피식 웃음과 함께 한마디, , 괜찮은데. 그리고 지난 백일 간 매일 0.03mm쯤 자라난 머리카락을 확인하며 역시, 시간은 힘이 세다고 흐뭇해한다.

자연스러운 것만큼 편안한 게 있을까? 가발을 쓴 내 모습은 3개월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외출에서 돌아와 가발을 벗는 순간 에어컨도 없는 거실이 대나무 숲으로 바뀌는 마법이 펼쳐지고, 그만 헤어지고 싶다는 바람은 커져만 간다. 날이 더워진다. 가볍게 외출을 하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바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아니 아무렇지도 않을 날을 기다린다. 그저 별일 없는 날이면 충분하다.

 

 

 

 

한국산문 20238월호 특집 다시 쓰는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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