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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있는 가방    
글쓴이 : 진연후    21-03-23 11:19    조회 : 6,730

사연 있는 가방

진연후

제시어는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이다. 작은 손가방, 팔꿈치에 끼는 가방, 어깨에 메는 가방, 백팩 그리고 당일용 배낭, 1박 2일용 배낭 마지막으로 여행용 캐리어까지. 나는 가방에 욕심 없는 여자라고 말했다면 급하게 수정하겠다. 그 전에 유효기간이 지나 이별한 가방도 수십 개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많은 가방에 사연 하나가 없다. 늦은 나이가 되도록 시험에서 놓여나지 못했으니 ‘가방끈이 짧아도 경우는 안다’고 큰소리 칠 일은 없고, 비오는 날 온몸으로 사수해야 할 적금 부어 산 ‘명품가방’도 하나 없다. 미혼인 내가 가방 싸서 가출할 일은 더더욱 없다. 도서관에서 내 가방에 쪽지를 넣어둔 남학생도 없었고,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어 인연을 만든 적도 없다.

오랜만에 지인과 통화를 했다. 매우 친절하고 우아한 A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친정 시댁 모두 부유하고 남편의 경제적 능력도 좋고 자식들까지 독립한 그녀에게 고민이란 건 없어 보였는데, 그런 그녀를 가끔 힘들게 하는 남편의 요구가 있다고. 남편이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 가방을 싸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방을 싸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가방을 싸주기가 너무 싫단다. 그래서 가방을 안 싸주려고 언쟁을 하고 싸주면서도 잔소리를 하게 되니 서로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다. 가방을 싸는 것만이 아니다. 당연히 돌아와서 가방을 풀어야 하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해달라고 하고 아내는 당신 가방을 왜 내가 풀어야 하느냐고 안 해준다는 것이다. 시댁 문제와 경제적 문제로 남편과 한 차례 폭풍을 겪은 지인은 가방 싸는 문제가 부부 간의 갈등이 될 수도 있는지 몰랐다며 통화를 끝냈다.

내가 가방을 싸는 경우는 여행을 갈 때이다. 며칠짜리인지 누구와 함께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가방을 고르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이다. 가방을 눕혀놓고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동안 행복 바이러스가 온몸에 가득 차오른다. 경험이 없어 확신은 못하지만 신혼여행도 여행가방을 챙길 때 가장 설레지 않을까? 가방을 싸며 들뜬 마음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기도가 절로 나오는 건 역마살이 낀 탓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지인 중에 아들 둘을 키운 분이 있다. 아들들이 이십대를 넘어가면서부터 그 또래 여자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단다. 그러던 중 커플들을 보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생겼는데, 화장실 앞에서 남자가 여자 핸드백을 들고 서 있는 경우라고 한다. 핸드백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굳이 그걸 남자가 여자 화장실 앞에서 들고 서 있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이유는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산에 다닐 때 이해되지 않았던 그림이 기억난다. 산에 오르며 배낭을 남자에게 맡기는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끼리만 갈 때는 못 보던 장면이다. 물론 대신 들어주겠다고 내게 친절을 베푸는 이도 없었지만, 나도 맡길 생각이 1도 없었다. 배낭을 메고 있어야 혹 넘어져도 덜 위험하고, 물통 하나 김밥 한 줄 오이 몇 개 사탕 한 봉지 그걸 못 들 만큼 노약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배낭을 맡긴 여자들 가방엔 심지어 김밥 한 줄도 들어 있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걸 맡긴 여자와 앞뒤로 배낭을 멘 남자는 산을 내려와서도 만남이 이어진다는 걸 아주 늦게 늦게 알게 되었지만.

지금 그 아주머니 아들 중 하나는 아직까지 혼자 산다는데, 가방을 들어줄 여자를 못 만난 건지 가방을 안 들어줘서 인연이 안 이루어진 건지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누구에게 가방을 맡기지 않는다. 내 가방은 내가 싸고 내가 들자. 캠페인 문구도 아니고 공감하는 이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각자 자기 가방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면 어느 가정에는 평화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침이면 텀블러와 손수건 두 장, 시장바구니 그리고 가끔은 수저까지 챙겨 넣었다가 집에 들어오면 다시 다 꺼내어 식탁 위에 늘어놓는다. 더 들어온 건 지하철 입구에서 받은 식당 또는 헬스장 광고 전단지뿐이다. 새로운 건 없다. 사연도 없다. 낭만적인 사연만 있으란 법이 없으니 어쩌면 사연 없는 가방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뻑뻑한 지퍼가 불안한 이 가방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가방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준 것에 만족하면서, 나는 내일 아침에도 변함없이 씻어 말린 텀블러와 새 손수건을 가방에 챙겨 넣을 것이다.


인간과 문학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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