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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소리 <좋은수필> 발표    
글쓴이 : 최선자    22-05-12 19:44    조회 : 3,546

풍경소리

                  최선자

  자주 바람이 된다. 서재 문틀에 걸어 놓은 풍경을 손으로 쳐보는 것이다. 그때마다 절 마당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 울적하거나 화가 날 때도 청아한 풍경소리가 매만진 마음이 여운에 젖으면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길을 가다가 오래된 풍경에 시선이 멈췄다. 중년 아저씨가 좌판도 없이 인도에 물건을 늘어놓고 무심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내가 풍경에 관심을 보이자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풍경을 살피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오히려 팔려고 애쓰는 것보다 신뢰가 갔다. 재질이 놋쇠인 듯한 풍경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 곡선의 단아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손에 들고 쳐보니 소리와 여운도 일품이었다.

  크기보다 제법 묵직하다. 몸체鐸身의 길이와 맨 아래 지름이 내 검지 두 마디 정도다. 풍경을 감싸듯 크고 작은 산이 그려졌다. 산봉우리까지 곡선인 풍경에서 만든이의 온화한 성품이 느껴진다. 몸체에 부딪혀 소리가 나게 하는 치게鐸舌는 콩알 같다. 중앙의 작은 판을 중심으로 네 개가 십자 모양으로 달려있다. 자세히 보면 하나가 약간 크다. 큰형 노릇을 하는지 일을 제일 많이 한다. 판 중앙에서 몸체 아래로 늘어진 사슬 줄에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붕어風板가 매달렸다. 세월의 발자국에 비닐과 지느러미의 빗금이 선명해 금방 헤엄쳐 갈 것 같다.

  집안에서 풍경소리를 듣기에는 무리다. 베란다에 걸어 놓아도 마찬가지였다. 붕어가 움직일 만큼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 잃어버린 게 한두 가지던가.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몸은 집안에 자연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도 더위를 모른다. 현관문에 달까도 생각했지만, 풍경소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대신 내가 바람이 되기로 했다. 서재 문틀에 못을 박고 걸었다.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즐거워진다. 번뇌에 빠졌거나 화가 날 때는 오래 듣는다. 음악보다 자연의 소리를 좋아한다. 가끔 여행길에 파도 소리나 새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등을 손전화기에 녹음해 와서 듣는다. 요즘은 무섬 외나무다리 밑을 흐르던 물소리를 자주 듣는다.

  종소리의 향기는 여운이다. 내가 범종 소리나 풍경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다. 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듯이 종소리의 여운도 마찬가지다. 은은한 소리가 마음을 씻어준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건 바람이 되어서도 느낀다. 붕어의 몸이 돌지 않거나 한 바퀴 정도 돌게 치면 풍경소리가 더 맑고 여운이 길다. 하지만 세게 쳐서 두세 바퀴 돌면 소리만 크고 여운이 짧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진도 팽목항 방파제 난간에는 풍경들이 달렸다. 작은 몸으로 세찬 바닷바람에 제대로 울지도 못한다. 마치 세월호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갈매기도 서러운지 날지 않던 검푸른 바다. 차마,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의례적인 인사 같아 못했다. 풍경처럼 맹골군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초겨울, 동학사에 갔다.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고즈넉한 산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후에 도착한 게 탈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날씨가 흐려졌다. 다섯 시가 넘자 바람이 강해졌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풍경소리를 따라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며칠 동안 암자에서 지냈던 경험의 투영이었을까? 범종루 처마 끝에서 온몸으로 울고 있는 풍경이 부처님께 매달려 흐느끼는 여인 같았다.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을볕에 보은의 대추가 얼굴을 붉히던 날, 법주사 팔상전 풍경은 비췻빛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지 뭉게구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지나던 바람이 위험하다고 말리자,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악연 속에 있으면 고통스럽고 선연들 속에 있으면 인생 행로가 바뀐다. 내가 만학도로 소설과 수필,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중년의 끝자락에 만난 선연들 덕분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나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준 선생님, 상처 입은 영혼들을 시로 치유해 주려고 애쓰는 교수님, 예술대학원에서 소설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대학교 동기.

  옛날부터 절이나 암자에서 풍경을 주로 썼다. 물고기 풍판이 많은 이유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물고기처럼 자지 않고 수행에 임하라는 뜻이다. 법구인 목어도 마찬가지다. 신라 때 만든 석탑에도 탑 모서리마다 풍경을 달아두었던 구멍이 남아 있다.

  풍경은 처음 쇳소리를 싫어하는 산짐승을 쫓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절이나 암자가 깊은 산속에 있으니 스님들도 산짐승의 습격을 받았을 게다. 어찌 보면 무기나 다름없다. 그런 풍경에도 아름다운 모양과 소리, 운치를 더하기 위해서 애썼을 옛사람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단독에 살았으면 한다. 욕심을 부리면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이면 더 좋겠다. 바람이 부는 날 마루에 앉아 처마 끝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풍경소리의 여운 같은 선연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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