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국회의사당
신 미 순
서울이 고향인 나에게도 향수<鄕愁>가 느껴지는 그리움과 아련한 추억이 몇가지 있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 이라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 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양화도 나의 주 등으로 불렸다. 여백(餘白)의 터에 세워진 동양 최대 규모의 국회의사당,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일번지인 현장이기도 하다. 풍수에서는 여의도처럼 강(江)사이에 위치한 섬을 행주형(行舟形 배가 떠 있는 모양)이라 칭한다. 과거에는 양마산(羊馬山)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곳에 목장을 만들어 양과 말을 길렀기 때문에 양마산 또는 양말산 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산은 해발고도 약 190m였다. 현재는 이 산을 깎은 터에 국회의사당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나의 고향 여의도다.
내가 영동초등학교 1학년까지 마치고 나서 우리 집은 국회의사당을 짓기 위한 철거민으로 봉천동과 신림동을 선택 이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집은 신림동으로 왔다.
당시 특별한 건축 자재가 없었던 시절 여의도의 집 원형 그대로를 옮겨와서 짜 맞춤으로 목재 건물의 새집인 보금자리가 완성되었다. 문성초등학교 2학년에 전학을 와서 앵두나무 우물가 앞집의 양순이라는 또래 친구와 같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집과 학교와의 거리는 대략 4km이며 왕복 8km 정도 된다. 현재 도로명 주소는 금천구 시흥대로로 바뀌었는데 대중교통이 발달 되지 않은 그 옛날에는 버스를 타는 곳까지 나가는 길이 멀었고, 학교 앞 버스정류장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지름길로 걸어 다니는 게 마음 편했다. 아침에 학교 가자고 부르면 양순이는 언제나 항상 내가 부르는 시간에 일어나서 양치질을 했다. 거리나 가까워야 혼자 간단 말이지 이건 정말 곤욕이었는데 아마도 나의 인내심은 이때부터 길러졌지 싶다. 어쨌든 양순이를 기다리는 동안 그 옛날 부잣집 아이들만 갖고 다닌다는 보온 도시락을 간식과 함께 양순이 엄마는 얼른 내게 안겨준다. 양순이와 같이 가라는 신호다.
학교 가는 길에는 미군이 주둔하였고 포탄과 탄약고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사시사철 논농사며 모심기 모내기 풍경과 밭작물 농사, 봄에는 하얀 감자 꽃이 넓은 들판을 하얀 물결로 수 놓았다 너무나 곱고 예뻤다. 봄에는 비가 와도 좋지만 장마에는 학교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봄에는 산딸기와 가을에는 검게 익은 머루를 따 먹으면서 자연의 변화에 고마워했다. 남자아이들은 참외 무 서리를 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던 시절, 여름 어느 날 아카시아 향 내음에 매료되어 잎으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토끼풀로 꽃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차며 어린 시절에 멀고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가을에는 황금 들판의 해 질녁 저녁 노을도 잊을 수 없는 멋진 풍경으로 다가왔고 보잘것없는 허수아비도 다양한 형태의 모양과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50년 전 비포장도로가 포장도로보다 많았던 시절 오죽하면 남편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산다고 할 정도로 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 현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교실은 진흙과 황토 흙을 묻어 들인 신발과 우산으로 미끄러웠다. 의자에 젖은 옷을 말리고 도시락을 난로에 얹고 수업은 시작되었다. 1970년대 나라가 어렵던 시절 다 같이 못살았고 혼식 장려로 선생님의 도시락 점검이 자주 있었다. 달걀부침을 도시락밥에 얹어 오는 친구가 부러웠고 원형 소시지가 최고의 반찬인 시절이었다.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에는 도시락 반찬으로 남은 깍두기를 먹을 때도 종종 있었다. 학교 후문에서 달고나 뽑기에 열정을 더하며 라면 땅, 엿 번데기, 쫄쫄이의 간식과 고구마튀김 등을 떡볶이 국물에 듬뿍 찍어서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암튼 하굣길에 간식 먹는 재미가 솔솔하여 은근히 기다려졌다. 여름 방학에는 메뚜기를 잠자리채로 잡아서 버들강아지 풀에 꿰어서 구워 먹고 개구리 뒷다리는 영양가도 만점이지만 구강염이나 침 흘리는데도 특효라서 태우지 않게 노릇노릇 구워서 먹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어둑어둑 해질 무렵까지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저녁을 먹으라며 부를 때까지 놀이에 열중하던 시절이 좋았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올 때는 언덕길에서 마대 포대나 장판지 조각으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하나의 추억이며 즐거움이었다,
결혼 후에 양순이 남편 직장이 지방이라서 연락이 뜸해졌고 명절에 서로 친정에 왔을때나 몇번 보구서 자녀들 돌잔치에 왕래가 있었던게 전부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몇 해 전에 양순이가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짝꿍을 잃은 슬픔에 한동안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여의도에는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한 하중도 라는 곳이 있다. 이 섬은 한강의 마포대교와 서강대교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밤섬이라 고도 한다. 지명의 유래는 모양이 밤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 문헌에 따르면 뛰어난 경치를 지녀 율도명사(栗島明沙),즉 맑은 모래가 널리 펼쳐진 섬의 풍광이 좋다 하여 마포팔경중의 하나로 꼽혔다. 500년 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 이곳은 마포항이 물산의 집산지로서 번성하였던 까닭에 고유의 전통 한선(황포 돗 배) 제조업이 발달 하였고 배짓기 및 진수 등의 과정에서 유래된 “마포 나룻배 진수놀이” 이라는 독특한 전통문화를 간직해왔다.
넓은 모래사장과 땅콩 밭이 있었고 목축장이 있었던 여의도, 마포와 영등포 사이를 흐르는 한강 변에 위치한 섬 여의도, 미군 비행장으로 활용된 여의도, 자전거 광장으로 지역주민들의 건강증진은 물론 국군의 날 행사시에 여러 학교가 모여서 모자이크형식의 카드 섹션(card section)으로 즐거웠다. 국풍 81을 열었었고 5.16광장 서북쪽에 뚫린 도로 등 수많은 추억을 공유한 여의도 한국방송공사 KBS의 잃어버린 30년 남북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곳이 바로 여의도이다. 지금은 봄이 오면 윤중로 벚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정치의 일번지로 자리매김하고 우리나라 입법부의 기틀을 다지고 있는 나의 고향 여의도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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