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관, 박장관, 신장관
신미순
“따르릉.”
“네에 정관장입니다.”
“거기 정 장관 댁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관장이에요.”
전화를 끊은 후에 혼잣말로 박 장관 집이면 좋겠네요, 했다. 큰 아들이 대학 3학년 되던 해인 2010년의 일이다. 자영업의 꽃으로 불리는 정관장 가맹점 사업 때였다. 명성만큼이나 경쟁자도 많아서 1년 6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다.
면접관은 한국인삼공사 본사 영업 본부장과 지역 담당자로 비교적 간단한 질문과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면접 내용은 신도시여서 매장 주변 1.5km를 반경으로 역세권마다 가맹점이 들어설 것이며, 영업은 해 본 적이 있느냐, 등등 질문과 함께 영업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받고 가맹점 승인을 따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본사의 법규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가. 매장 전면 유리창이 4M 이상 되어야 하며 실평수 15평, 창고평수 5평.
나. 매장 앞 도로는 4차선 이상.
위의 조건으로 상가를 계약하려니 보증금이며 월세가 만만치 않았다. 매장 운영과 영업에 필요한 컴퓨터, 판매 제품과 홍삼을 달이는 기계 및 간판과 집기들을 주문했다. 업무일지, 쇼핑백, 매장을 알리는 전단지와 명함 주문 등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픈 날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주변 상가에 고사떡을 돌리고 매장을 알렸다.
주변은 국민은행, 농협, 새마을금고 등등 제1, 제2 금융권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상가는 롯데리아와 총각네 야채가게 중간에 있었다. 맞은편 상가는 지역에서 유명한 치과와 반찬가게, 꽃집, 이름난 보셋집 등이 황금상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 사업이 우후죽순 번성할 시기여서 부가세를 포함한 매장 월세가 363만 원이고 관리비, 판촉비를 더하면 매월 지출비가 사백만 원이 훌쩍 넘는다.
10년 정도를 매달 이 돈을 꼬박꼬박 내고 나니 회의가 들어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명 브랜드일수록 매출에 대한 이윤이 적다. 상가 건물주 좋은 일시키는 것만 같아서 더 이상 보람도 직업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하던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진퇴양난의 길에 접어들었다.
경기 침체로 매출은 점점 줄어드는데 매장 월세는 오히려 올려 달라고 하니 난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차에 반사이익이라고 해야 할까, ‘신종플루’가 터졌다. 건강 기능 식품으로 호황을 맞았고 기대 이상으로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우리 매장은 역세권과 거리가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역세권으로 이전을 하라는 본사의 권고를 피하기가 어려웠다.
두 아들이 대학생인 상황에서 매장을 그만 둘 수가 없었고. 큰돈은 못 벌어도 현상 유지하면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역세권으로 매장 이전을 결정했다. 규정대로 본사에서 정해준 업체에다 공사를 맡길 수밖에 없었고, 고가의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바뀌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영업과 고객 관리에 사용하던 컴퓨터 한 대뿐이었다. 역세권으로 상가를 이전한 후에 경기 침체로 기존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이유인즉 해외 유학이 만연해졌고, 여행 인구가 늘어나면서, 미국이나 유럽 등 현지에서 비타민과 대체식품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인테리어 비용이 아까워서 상가 계약서를 처음부터 5년으로 쓴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기존의 상가는 동일한 조건으로 재연장이 가능하다. 이를 ‘묵시적 갱신’이라고 하며, 한 번 더 연장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얘들 결혼할 때까지만 한다고, 오래오래 잘 될 거라는 유명 브랜드에 대한 무한 신뢰가 문제였다.
어느덧 대학을 졸업한 두 아들 월급의 절반 이상을 모두 매장 임대료와 생활비로 써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어떻게든 매출을 올려보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사회생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연간 매출을 좌우하는 최우수 고객들에게 생일 케이크와 미역은 물론이고 명절에는 고가의 선물까지 챙겨드렸다.
궁여지책으로 용기를 냈다. 인삼공사 본사 부여 공장 견학을 단독으로 진행하긴 어렵다. 보통은 가맹점 2~3곳에서 함께 추진하거나, 본사에서 우수고객을 위한 행사를 할 때 보내드리는 정도이다. 하지만 고객들에게 단체 문자와 개별 문자를 보내며 인원을 확보하고, 일일이 확인했다. 60~70대 후반 고객님들을 모시고 다녀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하루 행사지만 날씨도 좋아야 하고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마침 큰 아들이 월차를 내서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본사의 지원은 45인승 대형버스와 공장 견학 시 증정품 정도다. 버스가 45인승이면 출발 인원이 30명은 돼야 인원에 따른 매출도 기대하고 가맹점 사장으로서 명분도 선다. 그 외 점심 식사, 오며 가며 간식과 운전기사 수고료, 부여 낙화암 입장, 등 모두 가맹점 사장의 몫이다. 무왕의 장남이자 백제의 의자왕 말기에 삼천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는 낙화암, 지금은 강물 위에 유유히 흐르는 황포돛배만 몇 척 떠있을 뿐이다. 낙화암 내에 중간쯤에 갈림길이 있는데, 일행 중에 수험생 엄마가 불공을 드리다가 늦게 나와 우리 일행이 애타게 찾아 헤맸지만 무탈히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여 절반은 성공이었다.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바빴다. 자영업은 하루 15시간 이상 늘 매장에 머물게 했고, 금액이 크다는 이유로 맞벌이 부부의 늦은 귀가 시간에 맞추어 달인 홍삼을 직접 배달해야만 했다. 저녁밥은 거의 밤 9시경에 먹을 때가 많았고 정기휴무에도 문을 여는 일이 다반사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기울어져 가는 경기 침체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만 14년 동안 해오던 일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되었다. 애면글면하면서 상가 주인집을 들락날락하고 무던히 애도 많이 썼다. 본사 영업본부장에게 장문의 글을 두세 번 보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지역 담당자는 중국어를 하면 면세점에 취직시켜 준다고 나를 달랬다. 애통하고 서러운 마음에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절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외국 속담 중에 ‘웃지 않으면 장사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요즘이야 저변 확대가 되어 젊은 층 수요도 생겨났지만, 어쨌든 장사란 쉽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힘들고 버거웠고 내 청춘을 다 바친 사회생활이어서 후회는 없다. 단 한 가지, 두 아들 월급의 절반 이상을 5년 동안 매장 임대료와 생활비에 보태 썼던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그동안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무탈하게 마쳤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부모에게 월급의 절반 이상을 선뜻 내어주고 퇴근 후에도 두 아들이 교대로 매장 일까지 도와주며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올곧게 자라준 두 아들이 고맙다. 박 장관이 되는 그날까지.
“당신도 고생했어. 신 장관도 괜찮은데.”라며 남편이 위로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