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강수경
얼마 전 공항 검색대에서 또 실랑이가 있었다. 잠깐 옆으로 와서 캐리어를 열어보라는 검색대 직원의 말이 떨어지자, 깜빡하고 가져온 것이 떠올랐다. 열쇠고리로 달고 다니고, 지갑 속에 카드로 위장하며 그것과 함께 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결국 기내 반입은 거절됐다. 씩씩대며 수화물 카운터로 내려가 작은 포장재에 그것을 넣어 부친 뒤에야 겨우 탑승할 수 있었고, 나는 그런 번거로움을 빈번히 감수해야만 했다.
일명 맥가이버 칼로 유명한 멀티 툴 포켓 아미 나이프. 몇 년 전부터는 신용카드와 흡사한 『스위스 카드』를 선보였다. 그 스위스 카드 속, 3.5㎝ 옷핀만 한 작은 칼이 공항 검색대에서 자꾸 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사장님 소리가 듣고 싶었던 단순한 이유 하나로, 철없이 뛰어들어 작은 커피점을 운영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던 그때는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이 정도를 넘어섰던, 이십 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였기도 했다.
주위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나이가 어려서 주목을 받았고, 사장이라는 직함은 매우 달콤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던 자금난에도, 가게를 처분할 생각이 없었다. 가게 가까운 곳으로 이사까지 온 상황에서 포기는 쉽지 않았다. 집과 가게를 오가는 시간이 조금씩 그렇게 쌓여갔다.
어느 날, 퇴근 시간에 맞추어 직원들을 먼저 보낸 뒤, 대충 마감하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남자 친구는 그날따라 전화가 없었다. 가다가 바로 옆 건물 횟집 사장과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과의 거리는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상가가 밀집된 곳을 좀 더 지나면 주택단지로 이어진다, 주택단지로 들어서면 길은 약간 어두워졌다. 단골 미용실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 50m를 더 가면 비디오 가게가 나오는데, 그곳까지는 꽤 넓은 길이었다. 비디오 가게 간판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안쪽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사장과 비디오 진열대 앞에 서 있는 손님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가게 사장이 밖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보고,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 남자도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가게 문을 빼꼼히 열고 겸연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테이프 밀린 것 내일 갖다 드릴게요.”
그곳을 끼고 바로 왼쪽으로 돌면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눈으로도 저만치 보이는 집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주위는 조용했고, 어둠은 짙게 깔려 있었다.
집 현관문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갑자기 뒤에서 타다닥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3미터쯤 뒤에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등 뒤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윤곽을 드러내 주었지만, 그 윤곽은 잿빛으로 산란한 범벅된 종잇장 위에, 칠흑 같은 그림자 모양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놀란 마음이 위험을 감지하는 직감보다 빨랐다. 타다닥 소리와 뒤를 바라본 것과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을 때는 2, 3초 정도의 찰나였다. 남자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로 눈앞에 있는 현관문을 쳐다보면서 한 걸음 뗐다. 혼잣말처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아, 놀라라.”
병원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2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경찰들과 가까운 동네 지인 몇 분과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집 주인아저씨도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나를 위해 경찰관이 설명을 이어갔고, 의사는 외상 상태를 말해주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왔다. 깨어난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건 뻑치기.
집 현관문 앞에서 그놈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각목 같은 둔기를 사용해 내 머리 뒤통수를 후려쳤다. 쓰러져 피가 땅에 고여 흐르는 것을 보고도, 다시 한 번 내 얼굴 정면을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는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손아귀로 잡아채 끊었고,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손목에 걸려있던 클러치 백을 통째로 챙기고 사라졌다. 비명을 듣고 집주인이 나를 발견한 지 고작 1, 2분 사이에 사건은 일어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칫 죽음을 허락할 수도 있었던 그 사건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낸 경찰과 내 진술 속에서, 간접·정황증거만 남기고 결국 미궁으로 빠졌다. 아쉬운 결과였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바로 상처였다. 상처로 남은 것은 중증 뇌진탕도, 코뼈가 골절된 것도 아니었다. 신체적 외상에 의한 후유증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오랫동안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사고 직후 약 6개월 동안은 거의 밤에 나가지 않았고, 부득이할 경우 항상 누군가 곁에 있어야만 나갈 수 있었을 만큼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렇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밤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져 간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지만, 대신 낯선 호신용품에 대한 강한 집착이 생겨났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른다는 호신용품들을, 휴대하기 편한 작은 사이즈로 이것저것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미니 맥가이버 칼이었다. 트라우마의 연장 선상에 놓여버린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경계심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오류로 남아 있다.
살다 보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어떤 경우로도 상처는 우리 곁에 있다. 상처는 버린다고 쉽게 떠나지 않았으며, 설령 떠난다 해도 흔적을 남겼다. 나는 아직도 깨끗하게 지우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시간의 힘을 빌려 상처가 스스로 아물도록 지켜봐 줄 뿐이다. 간혹 상처를 들여다보며 원망하면, 반드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상처와 타협 중이다.
20여년 다 지난 그 사건을 생각하면 모 프로그램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정도 지나 극심한 두통이 사라질 때 즈음, 의식 소실로 모두 지워진 기억의 한 조각이 소름 돋게 흐리시 떠올랐었다. 쓰러져있는 머리 주위로 천천히 돌아 걸으며, 고개를 떨궈 내 얼굴을 쳐다보던 시커먼 그림자 모습. 적어도 그 순간만은 의지와 무관하게 내 눈은 뜨고 있어, 시선이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뒤따라와, 순간 돌아볼 때 멈칫 서 있었던 그 그림자 남자. 간판 불이 꺼질 때까지 비디오 가게 안에 서 있었던, 나를 살짝 쳐다봤던 그 남자. 왜 자꾸만 두 남자가 겹쳐지는 것일까.
자정이 훨씬 지나있다. 평소 단 음식을 싫어하는데 초콜릿이 먹고 싶다. 모자를 눌러쓰고 대충 옷을 껴입고 카드 두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 카드 두 장에서 약간 두꺼운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약간 두꺼운 스위스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어두운 밤길 잰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