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머물던 자리 - 김혜림
분리수거를 위해 내려간 1층에서 흑진주처럼 빛나는 녀석과 마주쳤다. 좁은 승강기 탓에 각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쑥한 새 피아노가 세로본능을 한 채 그렇게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얼마 후 피아노는 무사히 현관문을 통과한 것이 분명했다. 서툰 아이들에게 맡겨진 악기는 자주 비명을 질러댔다. 8층의 음 이탈 콘서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렸지만 누구하나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아이들이 귀한 시골에선 주인 잘못만나 고생하는 피아노의 불협화음도 용서가 되곤 한다.
십대 후반까지 피아노는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큰 사고를 당한 나는 온몸에 거즈와 붕대를 감은 채 위험한 놀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3층 건물 옥상사이를 겁도 없이 뛰어넘다 밑으로 지나가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도로 끝자락에 위치한 피아노교실로 끌려가는 내내 엄마 손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일곱 살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원장님, 얘 좀 낮 시간 동안만 여기에 붙잡아 놓아주세요.”
다짜고짜 앞치마에서 뭉칫돈을 꺼내 첫 달 수업료를 낸 엄마는 곧장 손님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버려진 기분이 된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렸다. 첫날은 그렇게 고리타분한 인상의 원장과 주인을 꼭 닮은 퀴퀴한 피아노를 번갈아 노려볼 뿐이었다.
일주일 내내 원장은 피아노를 거부하는 나를 가만히 두었다. 삐죽이 열려있는 문 사이로 자유로운 푸른 세상의 아이들을 훔쳐보며 탈출을 상상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활어 회를 쳐내던 카리스마 넘치는 그 시절의 엄마를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파리만 날리는 피아노교실의 학생은 대학 진학을 앞둔 뚱순 언니와 일곱 살 특유의 반항기를 품은 나, 둘뿐이었다.
만화책만 읽어대던 일주일을 끝낸 것은 문득 찾아온 피아노의 선율 때문이었다. 희미한 작은 점으로 시작한 연주는 선을 그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새 귓가에 숨어들었고 늘어진 몸을 깨우며 일곱 살 영혼에게 인사를 했다. 원장님의 짧고 투박한 두 손은 고목이 된 낡은 그랜드 피아노를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마술지팡이 같았다.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라난 것도 그날부터였다.
야생 조랑말 같은 나의 기행에 마침표를 찍은 연주곡은 베토벤의 <월광>이었다. 흙투성이였던 일곱 살의 손끝은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을 기억해갔다. 원장님은 제자 2호인 나를 아껴주었고, 부모님의 경제사정으로 들쑥날쑥한 출입에도 한결 같으셨다. 가끔 어깨에 두툼한 그 손이 말없이 얹히는 날은 큰 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것이 칭찬의 표현이라는 것을 여덟 살 봄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세 살이 되던 해 가을부터 이따금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던 원장님은 언제부턴가 나타나지 않았다. 성인이 된 뚱순 언니가 원장님 흉내를 낼라치면 나는 거세게 저항했다. 연습시간이 끝나고도 구석에 남아 <월광>을 연습하던 어느 날 낯익은 손길이 어깨를 스쳤다. 부쩍 마른 원장님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연주가 끝날 때까지 말없이 머물렀다. 틀린 부분을 이미 알고 있던 나는 위축된 눈으로 그녀의 처분을 기다렸다.
“연습을 많이 했구나. 틀려도 끝까지 가보는 것이 좋아. 스킬보다 중요한 것은 곡 전체를 이해하는 거니까.”
그 날이 원장님을 기억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몇 달 후 허름한 피아노교실은 허물어졌고 3층짜리 신축건물에는 당구장과 다방이 들어섰다. 사춘기인 나를 위해 엄마는 다른 곳을 알아보셨지만 이젠 의미가 없었다. 단지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롭지만 묵묵하고 아름다웠던 한 사람의 삶에 머물고 싶었던 것 같다.
중학교 입학식 때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고서야 원장님이 암투병중이었고, 서울 큰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언니의 행사와 겹쳐 혼자 입학식을 치룬 탓 일거라며 밤새 훌쩍거리는 나를 위로하였다. 나의 <월광>소나타가 어둠저편으로 희미해져가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렇게 나의 유년은 끝이 나고 있었고 피아노도 점점 멀어져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부모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드디어 이층집이 완성되었고 딸들은 달빛 가득한 방에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런 밤이면 알 수 없는 뭉클함으로 밤새 뒤척였다. 유독 넓었던 옥상은 달빛을 더 크고 넓게 담아낼 수 있었다. 새벽빛을 몰고 오는 하늘을 향해 떠나는 그 배에 나는 자주 오르곤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들과 쏘다니다 저녁 여섯시쯤 집에 돌아왔다. 대문은 열려있었지만 현관문이 잠겨 추위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이 되었고 분노는 점점 걱정으로 변해갔다. 한껏 멋을 내어 입은 얇은 빨강망토가 원망스러웠다. 12월의 추위가 온몸에 배어들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강아지의 온기라도 느끼려고 목줄을 풀어 품에 안아들었다. 혀로 얼굴을 마구 핥아대는 녀석을 용서하면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부모님은 밤 아홉시가 훌쩍 넘어서야 돌아오셨다. 양방향으로 일순간 열리는 대문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꿈 인가 싶어 눈을 문질렀다. 피아노였다. 검고 아름다운 피아노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얀 눈을 맞으며 나에게로 왔다. 아버지를 포함한 여섯 명의 장정이 거대한 피아노를 들어 옮기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추위에 상기된 엄마는 흥분한 목소리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하셨다.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연주를 시작했다. 베토벤의 <월광>과 쇼팽의 <녹턴>을 지나 <빗방울 전주곡>으로 달려갔고 이루마의 세미클래식에 빠져들기도 했다. 피아노는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했고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했으며,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다. 가장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그것은 달빛창가를 떠나 지금은 조카 방에 조용히 놓여있다. 가끔 찾아가 잠들어있던 건반을 무심히 툭툭 건드려본다. 그런 날이면 흑백영화 같은 따스한 시간들이 머물다 가곤 하였다.
피아노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모하고 순수했던 단발머리 소녀의 조금은 엉뚱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