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버지니아 울프
김 혜 림
오랫동안 잠 들어있던 문이 드디어 열렸다. 5월의 햇살 덕분에 난방을 하지 않은 구석방에서 온기를 느꼈던 탓일까. 시골집에 다락이 있었다는 깨달음과 그 큰 자물쇠의 열쇠에 대한 궁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녹슨 꾸러미에서 녀석을 찾아 멈추었던 시간의 문을 연다. 곰팡이를 막기 위해 트여놓은 창으로 먼지와 햇살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에 알 수 없는 먹먹함이 피어올랐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쌓인 책 더미에서 걸터앉아 낯익은 한권을 집어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 <세월>이다.
‘다락’이라는 공간, 그리고 꿉꿉한 곰팡이와 먼지가 이끄는 시간에 갇혀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가장 먼저 <세월>을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귀가 얇았던 언니가 길거리 책장수에게 낚여 집으로 끌고 온 세계문학전집 50권. 거기에 섞여있던 것은 분명히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파티를 위해 직접 꽃을 사러 나온 주인공의 어느 하루의 이야기인 그 소설은 삶과 죽음이라는 질문을 이제 막 시작한 중학생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댔다. 30년이란 시간을 넘나드는 수많은 생각과 질문에 빠진 클라리사, 광기로 결국 자살에 이르는 셉티머스.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접점도 없이 흩어지고 있었지만 어렴풋이나마 알 순 있었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지닌 클라리사와 삶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셉티머스 모두 삶 그 자체를 지독히도 사랑하고 있었음을.
조금 늦게 만난 <세월>은 두고두고 잠을 뒤척이며 옥상을 서성이게 했다. 그것은 예쁘고 고전적인 초록색 표지에 마음을 뺏겨 스무 살 생일에 자신에게 보낸 나의 선물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서울로 가고 홀로 집에 남는 시간이 길어지던 즈음이라 글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 소설처럼 현실에서도 많은 것들이 머무르고 떠나갔으며 상실되고 기억되었다. 인식하는 찰나에 경계가 없던 시간들은 추억이 되어 선명해졌다. 떠나온 과거를 돌아보는 순간엔 인생에 대한 소중함에 허한 속이 울렁거렸다. 겨우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내가 임종을 앞둔 노년의 급행열차를 미리 올라 타버린 느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지독하리만큼 예민한 감수성과 결벽증에 감염되어 스무 살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랫동안 앓은 고질적인 빈혈 탓이라며 아버지는 파리해진 막내딸을 위해 채 식지 않은 소의 생간을 구해 오시곤 했다. 한 접시의 슬픈 생명을 삼켜내기가 어려웠지만 아마 나는 살고 싶었나보다. 아버지가 보여주는 대로 흉내를 내며 어느새 그 비린 것을 꼭꼭 씹어 꿀꺽 삼키고 있었다. <세월>에서의 엘리너처럼 꿋꿋이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어 삶을 관조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이나마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채워져 가는 일상을 구분하고 나열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삶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샘물처럼 졸졸 흘러가던 시간이 세월로 뭉쳐져 어느 순간 증폭된 에너지와 감정의 해일이 되어 불청객처럼 찾아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과 삶의 가치, 그 이상의 어떤 소중함, 그리고 생명에 대한 경외 등이 연약하고 영민한 감성의 틀을 망가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은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돌아볼 추억의 시간과 굳이 나아가지 않아도 될 적당한 삶의 간극, 이른 새벽 그 절정의 지점에서 그녀는 발걸음을 물로 향하였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에 아름다운 작별을 고하며 그렇게 영원으로 남았다.
최고의 지성을 삼켜버린 물은 짙은 슬픔보다는 맑은 사유를 남기며 여전히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녀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뒤돌아보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던 순간, 그 꼭짓점에 다다른 때였음은 추측할 수 있다. 그녀의 자화상이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와 셉티머스 중 어느 누구였는지, 아님 <세월>의 엘리너였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이 주는 삶 그 자체로서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진정한 자유에의 갈망이 나의 무기력한 시간에도 조금은 섞여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시간이 간다. 마음 한가득 마중물이 차오른다. 어쩌면 다시 미세하고 불안하게 떨릴 것이다. 그것이 향한 방향이 늘 미래이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 독특한 방향성 때문에 과거가 실제보다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미래에는 또 다른 돌아봄으로 기억이 되겠지. 희뿌연 책 먼지사이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찾아 품에 안아들었다. 하나의 존재로서 물질과 공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변해가는 하늘빛에 다락이 어두웠다. 발밑을 조심하며 이제는 계단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세월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