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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풍로    
글쓴이 : 민영송    22-04-15 14:37    조회 : 4,297
   석유풍로.hwp (16.5K) [0] DATE : 2022-04-15 14:37:02

석유풍로

송민영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나는 부모가 없는 집에서 어른이었다. 맏이였던 나는 엄마의 치렁치렁한 카디건을 입고서는 괜히 엄마 노릇에 빠져 있었다. 저녁 시간. 부모님의 귀가는 늦었고, 배가 고프다는 동생들은 칭얼거렸다. 동생들에게 좀 더 어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뭐라도 해줄 게 없을까 하고 천장을 열어보니 라면이 보였다.

라면. 이전에도 몇 번을 끓여봤기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라면을 끓일 냄비를 찾으니 손잡이가 위로 길게 뻗은 냄비만 보인다. 라면이야 끓이면 그만. 바로 물을 받아 풍로에 올렸다.

우리 집은 당시만 해도 석유풍로를 사용했다. 어지간해서는 집집마다 LPG 가스통 하나쯤은 있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이었는지 우리 집은 내가 중학교를 올라갈 때까지 석유풍로를 사용했다.

석유풍로는 말 그대로 석유가 주원료로 요즘에는 레트로 열풍 때문인지 유튜브 등에서 곧잘 소개가 되곤 하는데, 1980년대만 해도 조리용 기구로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풍로. 나는 그것을 곤로라고 불렀다. 엄마가 곤로라고 했으니 곤로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일본어 표기였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여 심지를 아래쪽 기름통에 닿게 하여 불을 피우는 풍로는 중앙의 손잡이를 열고 기름이 묻어있는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곧바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다. 석유풍로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야 한다. 지금은 추억이 된 육면체의 성냥갑에 성냥의 머리를 그어서 불을 붙인다. 사실 한 번에 불이 붙는 경우는 드물었다. 겁이 많았던 터라 불을 붙이려고만 하면 손을 떨었고, 성냥을 몇 개 부러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불이 붙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생일이나 축하 자리에 빠지지 않는 케이크. 거기에는 항상 초와 성냥이 콤비로 들어있다. 여전히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건 겁이 난다.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고는 이내 성냥의 불은 손을 흔들어 얼른 끈다. 그리고는 석유 심지에 붙은 불이 옆으로 퍼질 수 있도록 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움직이면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면서 남은 심지에 불이 옮겨붙었다. 삼발이 위에 올려 둔 냄비의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사이 상을 펴고 라면 냄비를 올릴 자리를 만들었다. 어느새 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끓고 있다. 미리 준비해둔 라면과 스프를 냄비에 넣고, 라면이 잘 익도록 젓가락으로 면을 고루 퍼주었다. 이제 라면이 알맞게 잊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라면 냄새가 기가 막힌다. 이제는 불을 끌 차례. 재빨리 석유풍로 손잡이 부분을 소화로 옮겨 불을 끈다. 이제 냄비를 들어 올릴 차례. 한쪽에만 손잡이가 있어 이걸 어떻게 들어야지 하고 있던 찰나, 옷에 손잡이가 걸렸다. 옷이 너무 길었던 거다. 아뿔싸! 잘 끓여진 라면이 엎어져 떨어졌다. 그것도 내 발등으로.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비명을 질렀고, 소리에 놀란 동생들이 달려왔다. 이미 라면은 부엌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너무 뜨겁고 아팠지만 동생들 앞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침 물을 담아 둔 대야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 여동생을 시켜 옆집 할머니를 불러 달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옆집 할머니를 부르면 뭔가 해결책이 생길 것만 같았다. 찬물에 발을 담가 화기를 빼고 있으려니,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어쩌다 이랬냐며 혀를 끌끌 차시다가 감자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숟가락을 이용해 감자를 긁더니 그걸 화상으로 물집이 잡힌 발목과 발등에 올려놓으셨다. 그렇게 하면 화기가 빠진다고 말이다.

감자가 수분이 많아서 화기를 빼는데 도움이 된다지만, 실제로는 감염 위험이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거다. 하지만 그것을 어찌 알리. 부모가 부재한 사이 어린 나를 위해 손수 감자팩을 붙여주신 할머니는 내게 천사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화상 자국은 여전히 남아있어 화상 부위를 볼 때마다 그날을 상기하곤 한다. 당시 병원에는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감자팩이 명약이었는지 모른다다만 사고 이후 엄마 카디건은 쳐다보지도 않게 됐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바람을 타고 온 것인지 석유가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코를 자극했다. 나는 이 냄새를 맡으려고 잠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뭔가 편안해지면서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냄새는 곧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매캐한 냄새가 사라지고 난 후, 문득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이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누구는 그랬다. 이런 냄새 좋아하면 몸에 기생충이 사는 거라고. 정말 그럴까? 몸에 사는 기생충이 라면을 부르는 걸까?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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