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사랑을 먹었어
김선희
'원래는 사람이 떡을 먹는다. 이것은 떡이 사람을 먹은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즉 사람이 떡에게 먹힌 이야기렷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떡>의 첫 문장이다.매끄런 국수가 후루룩 넘어가듯 홀딱빠져 빨아들이듯 읽은 소설이다. 나는 지금부터 그 대상을 떡이아닌 술로 바꾸려한다. 사람이 술을 먹은, 아니 술이 사람을 먹은, 다시 말하면 술에게 사람이 먹혀버린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동창 K는 나를 귀찮게 따라다녔다. 그 애는 어릴 때 보약을 잘못 먹었는지 머리카락이 희끗거렸고 얼굴은 나이보다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노안이었다. 거기다가 아저씨 같은 팔자걸음이라니. 끊임없이 전화를 해대고 집 앞까지 찾아와서 선물에 편지에 온갖 작전으로 관심을 표현했지만 나는 그를 차갑게 외면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지만 열 번까지 찍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K는 적극적으로 바짝 짧게 찍어대다가 곧 포기해 버렸고 우리 사이는 차츰 데면데면해져 갔다. 내 간사한 마음은 그때서야 알에서 깨어나려는 새 마냥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뻔한 전개처럼 전화가 뜸해지니 기다려졌고 이대로 멀어져 버릴까 봐 두려워졌다. 어처구니없게도 결국엔 내가 K를 좋아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K를 좋아하는 마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간간이 전화해서 대학생활 얘기도 들려주고, 새로 사귄 여자친구 얘기까지 넉살 좋게 지껄여댔다. 내 입술은 질투심에 바르르 떨렸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입술을 붙잡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응, 그래? 좋겠다 야. 누가 너 같은 애를 만나주나 했는데 그래도 용케 만났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친구들과 다 같이 만남을 갖기도 했다. 누가 봐도 그와 나는 그저 고등학교동창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스무 살의 여름날, 그와 내가 주축이 되어 함께 만나던 친구들과 1박 2일의 캠핑을 가게 되었다. 거리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가 올려 퍼지던 그해 여름, 젊음이라는 무기로 무서울 것이 없던 우리는 7명이서 '추도'라는 작은 섬으로 텐트를 짊어지고 여행을 떠났다. 몇 년 동안 외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나는 이번여행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백해야겠어. 너를 좋아하게 됐다고. 우리 진지하게 만나보자고......"
아무것도 없는 외딴섬 폐교된 학교 안에서 밥을지어 먹고 , 떠들어대고 , 싱싱한 풀냄새에 코를 벌렁거리고 벌레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내내 우리들의 얼굴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붙잡고 싶을 만큼 좋은 시간은 왜 이리도 후딱 지나가버리는 건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위해 장작에 불을 피우고 소주 몇 명과 수박, 참치캔등으로 술상을 준비했다. 쏟아질 것 같은 별빛아래에 있는 우리들의 눈동자는 그 반짝임이 무색하리만큼 더욱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고백할 생각만 가득 차 있던 나는 낯빛이 홍조가 되고 심장은 벌렁벌렁 나 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고백해야지.'
입술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때 어디선가 스물대여섯쯤 돼 보이는 한 남자가 기타를 메고 나타났다.
"저는 이 마을에 살아요. 젊은 분들이 놀러 오셨다고 해서 한번 와봤어요. 잠깐 앉아도 되죠? 참, 제 이름은 정기범입니다. 여자분들은 기범이 오빠라고 부르면 됩니다."
섬마을 총각 기범오빠는 술자리에 합석해서 동네 얘기,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 얘기등 관심 없는 주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게는 한없이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손가락으로 수박을 후비며 씨를 고르거나 종이컵을 물어뜯으며 지루하다는 표현을 해봐도 눈치 없는 기범오빠는 갈 생각을 잊은 듯했다.
'고백해야 하는데......'
"우리 같이 노래 부를까요?" 오히려 그는 드르륵 기타를 긁어대며 본격적으로 놀아볼 기세였다. 머릿속에 고백할 대사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기타 소리에 맞춰 형식적으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내게 옆에 앉은 미숙이가 소주를 부은 종이컵을 내밀었다. 한 잔, 두 잔, 너 받아라, 나도 한잔 다오, 그렇게 조용히 둘이서 대화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속과 머리는 주인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기범오빠는 언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밤새도록 속에 있는 모든 걸 남김없이 게워내느라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 거울을 보니 온몸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끈적끈적하게 뭉치고 흩어져 그 꼴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술은 내 사랑고백까지 삼켜버리고 말았다.
술에게 잡아 먹혔던 나는 두고두고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우리 추도 갔을 때 선희 술 먹고 진상 부렸던 거 생각나냐? 소리 지르고, 울고, 토하고...... "
"야, 말도 마, 말도 마, 난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오죽 더러웠으면 쟤는 모기도 안 물더라. 우리는 밤새 모기에 뜯겨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야! 그만들 좀 해. 나 그 이후로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있거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과연 그럴까?" 키득키득.
술 때문에 고백을 하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버렸고 나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걸 보다 못한 친구 미숙이가 제안을 했다.
"내가 전화해서 물어봐줄까? 선희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정말? 그렇게 해줄래? 눈치 봐서 잘 물어봐야 해. 괜히 나 망신당하지 않게 말이야."
"알았어. 걱정 마. 봐서 그 분위기 아닌 것 같으면 그냥 안부만 묻고 끊을게."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얘기가 끝났으려나?'
기다리는 동안 누가 내 코를 쥐고 놓지 않는 듯 숨이 차오르고 손발까지 식어갔다. 목이 타들어가는 기다림 끝에 수화기를 부서질 듯 부여잡은 나는 방정맞게 다그쳤다.
"물어봤어? 뭐래?"
"응...... 알고 있었대. 네 마음."
"뭐라고? 어떻게? 난 전혀 티를 안 냈는데?"
"그날 추도 갔을 때 네가 술에 취해 말했었대."
"뭐? 뭐라고 했대?"
"사랑한다고......"
"윽..... 고백을 하긴 했었구나. 근데 그 얘기를 듣고도 여태껏 내색을 안 했던 거래?"
"응...... 걔는 너를 그냥 친구로 생각하고 있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래."
그 얘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미숙이를 불러내 다시는 입에도 대지 않을 거라던 술을 또다시 마시고 부어댔다. 흥건히 취하도록, 간간이 기억이 사라질 만큼.
집에 돌아와 음악을 틀어놓고 엉엉 울다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카세트테이프가 아침까지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오디오는 불덩이처럼 후끈거렸다. 집안 식구들 다 깨우고 욕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서웠던 건 손에 들려진 무선전화기였다. 재발신 버튼을 눌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K 네 집 전화번호 였다. 폴라로이드에서 방금 잡아 뺀 사진에 서서히 나타나는 형체처럼 조금씩 기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통화내용까지 점점 또렷해졌다. 차라리 아무 기억도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휘젓고 머리를 쥐어뜯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욕을 퍼지게 했던 것 ,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엉엉 울던 기억까지 모두 남김없이 생각이 났다. 애꿎은 전화기의 코드를 신경질 적으로 뽑아버린 나는 밀려오는 어젯밤의 기억들과 울렁거리는 속을 억눌러 가며 또다시 다짐을 했다. 다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