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를 벗고
유은영
2017년 1월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여에 갔다. 동생의 결혼식은 일요일 오전 10시였다. 이른 아침 버스 여행이 부담스러웠던 우리 부부는 결혼식 전날 미리 부여를 찾았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부여 성당 벽에 쓰여 있는 시를 보게 된 우리는 부여가 시인 신동엽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문학관이 궁금했던터라 폐관 시간을 검색하고 짐을 풀자마자 문학관으로 향했다.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고, 생전에 시인이 자주 앉았었을 마루에도 앉아보았다. 이때까지는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고향과 유명 시인의 고향이 같다는 생각밖에.
문학관의 규모는 큰 편은 아니었다. 문을 통과하여 작은 마당을 지나면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초가집인 생가와 현대식 건물인 문학관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현대식 건물의 왼쪽은 통유리로 된 기념품을 파는 공간이었다. 전시실은 오른쪽에 있었다. 전시실에는 시인의 인생길을 알 수 있는 사진과 자료들이 걸려 있었다. 자료들을 보면서 느낀 내 첫 감상은 ‘와, 잘생겼다.’였다. 시인 신동엽의 인물이 좋다는 사실은 고등학생 때 문학 참고서에 실린 사진을 보고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서적에 실린 자그마한 사진과 전시실에 걸린 실물 크기의 사진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이런저런 감상을 하면서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중년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희 문학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 신동엽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에 대해 들어보시겠습니까?”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나는 그의 말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지식 탐구가 취미인 남편이 먼저 나서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문학관의 관장인 김형수 시인이었다.
김형수 관장은 시인 신동엽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1930년에 부여에서 태어났고, 한국전쟁 당시 얻은 간디스토마로 인해, 간암으로 1969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껍데기는 가라’로 대표되는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문학 참고서에만 접했던 위대한 시인이 꽤 미남이었고, 안타까운 삶을 살았으며, 그 안타까운 삶으로 인해 단명했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이기도 했다.전시대에서 마주한 금전출납부 속의 작품은 신선하기도 했다. 들은 설명에 따르면, 신동엽 시인이 어딘가에서 상을 받았고, 그 상품이 금전출납부였으며, 종이 질이 좋아 그 금전출납부에 작품을 적어 두었다고 한다.
6년 만에 신동엽문학관을 다시 찾았다. SDU 문예창작학과 수필동아리 식구들과 함께였다.
부여 성당 벽에 쓰여 있는 시는 그대로였으나, 남편과 함께 머물던 숙소는 전시 공간이 되어있었다. 문학관 앞길도 조금 넓어진 감이 있었다. 지난 방문에서 단순히 기념품을 파는 공간이라고 여겼던 곳은 김형수 시인의 강연장이 되었다. 앞선 일정으로 무거워진 눈꺼풀과 힘겹게 싸워가며, 신동엽 시인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 속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으며,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래청 앞에 서서 맞절한다.’라는 구절에서는 한반도가 중립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전시실에서는 6년 전과 비슷한 그러나 조금은 달라진 상황을 마주했다. 6년의 세월 속에 밝혀진 진실들이 더해졌다. 남편과 단둘이 관람하던 과거와는 달리 문학인인 동아리 식구들과 함께해서였다. 김형수 시인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후배, 눈으로 열심히 신동엽 시인의 자취를 담는 동기와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는 선배까지 문학관을 즐기는 각자의 모습에서 묘한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그들을 뒤로한 채, 문학관 탐험에 나섰다. 신동엽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남겨진 기획전시실도 둘러보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옥상에도 올라 보았다. 비에 젖은 벤치를 보며 즐기지 못한 맑은 날의 벤치를 아쉬워했다. 아쉬움은 함께한 동아리 식구들의 웃음소리로 지울 수 있었다. 신동엽 시인과 함께 문학을 노래했을 법한 감나무를 바라보며 나 역시도 함께 문학을 노래할 수 있는 문우들이 있음에 행복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신동엽문학관과 그 속에서 만난 신동엽 시인은 아토피 피부염과 그 합병증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온 나에게 이제 그만 껍데기를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한마디를 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