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지 운명인지
유은영
동아리방 밖은 온통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물한 살, 여대생이었던 나는 아무 느낌도 없이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 동아리방 문이 열리고 낯선 남학생 한 명이 들어왔다. 언뜻 바라본 그는 그다지 잘생기지 않은 얼굴과 자그마한 키에 후줄근한 옷을 입은, 평범하다 못해 매우 촌스러운 패션을 하고 있었다. 촌스러운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씩씩하고도 깍듯하게 선배인 나에게 인사 했다.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고 그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후배 H는 자주 동아리방에 얼굴을 비추었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대화 내용이라는 것이 고작 출신 고등학교가 가까웠다는 둥,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둥, 하나 마나 한 이야기 정도였지만 방향이 같은 집으로 가면서 우리는 좀 더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동아리방에 자주 들르지 못했다. 가끔 시간을 내서 동아리방에 가보면 H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다른 후배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H가 군입대로 휴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바빠졌고,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보았던 그는 내 기억에서 점점 잊혀 졌다.
졸업 후, 동아리 송년회에 참석했다. 그곳에 짧은 머리에 촌스러운 옷을 입은 H가 나타났다. 군대 말년 휴가를 나왔다며, 나에게 친한 척을 했다. 하지만, 그날 H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과 어울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H는 사는 동네가 가깝다는 점, 출신 고등학교가 가깝다는 점 등을 들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친한 척을 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전화번호를 받아 갔다.
몇 달이 흘렀다. 회사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상사들의 눈을 피해 전화를 받았다. H의 전화였다. 선배 회사 앞이라며, 점심을 사달라고 했다. 그날은 너무 바빠서, 다음에 사주겠다고 하고 거절했다.
그날 이후,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늘 같았다. 회사 앞이라고. 그리고 점심이든 커피든 사달라고. 결국 우리는 함께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그렇게 친해진 우리는 휴일에 만나서 밥을 먹기도 하고, 산책도 했다. 심지어 손을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전화 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도 그는 시큰둥하기 일쑤였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멀어졌다.
그와 연락이 뜸해지고,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동아리 동기로부터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자 친구를 소개해 줘서 함께 본 적이 있다며, 매우 예뻤다고도 했다. 그의 여자 친구 소식을 듣는 순간, 배신감을 느꼈다. 그 여자 때문에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했다.
또다시 반년쯤 지난 후, 그가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소식을 자주 듣게 되었다.
몇 년 후 가을이었다. 기억에 11월이었던 것 같다. 친구와 신촌에서 놀고 있었다. 늦가을, 스물아홉 노처녀 둘이 왜 우리는 이 나이에 애인도 없느냐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 머릿속에서 전화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핸드폰에서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린 그 번호가. 그래서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가더니 드디어 전화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신촌인데 나올래?”
통화를 마치고 한 시간 후 나와 내 친구 앞에 그가 나타났다. 내 친구는 어색하다면서 먼저 집으로 갔고, 나와 그 단둘이 맥주를 마시러 갔다. 술집으로 향하는 길, 오랜만에 만난 그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며칠 전에도 만난 사이처럼 서로 대화를 이어갔다. 술집에서도 그와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면서 수다를 떨었다. 순간 그의 뒤에서 후광이 보였다. 아마도 그에게 반했던 것 같다. 훗날 물었더니 그도 그랬었다고 했다. 술자리 이후, 나는 그에게 고백했다.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분홍색 하트의 배경 화면과 사랑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설치해 두고, 그에게 전화했다. 내 미니홈피에 들어와 보라고. 거기에 내 마음이 있다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늘 밤 열 시가 넘는 시간에 일이 끝났지만 우리는 매일 매일 만났다. 매일 안 만나면 큰일이나 날 것처럼. 열 시가 넘은 시각의 만남인지라, 데이트라고는 신촌에서 우리 집까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걷고 있어서.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무르익어 갔다. 사소한 일로 행복해하고, 울며불며 싸우기도 했지만, 헤어지자는 말, 그만 만나자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한 지 4년 되던 해에 결혼했다.
현재 우리는 결혼 15년 차 부부이다. 여전히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한다. 처음 동아리방에서 봤을 때, 다시 만나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앞으로 5년, 10년 그리고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연애할 때처럼 늘 서로에게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고 말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