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금현주
텔레비전에서 어떤 드라마를 보다가 노랗게 물든 유채꽃 가득한 섬에 빠져버렸다. 손가락 검색으로 그 섬은 완도의 청산도라는 서울에서 꽤 거리가 있는 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 휴가철이 되어 친한 동생 S와 함께 그 섬에 갔다. 버스 타고 배 타고 도착한 청산도, 여름이라 유채꽃은 없었지만 고즈넉한 섬의 공기와 시간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MBTI 성격유형에서 계획형 J인 나였지만 무작정 떠나는 여행의 맛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숙소는 따로 정해 놓지 않았다. 마냥 다니다 정하기로 하고 그냥 걸었다. 트럭 하나가 앞에 섰고 운전석에는 단단해 보이는 할머니가 계셨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셨고 여행 와서 둘러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많이 찾는 관광지에 태워다 주겠다 하셨다. 우린 주저 없이 아니 이런 예상치 못한 일에 기뻐하며 바로 탔다. 울퉁불퉁 시골길 위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할머니가 농사짓고 계신 유자밭이었고 잠깐 들러 물을 주시고는 여기저기 유명한 곳에 태워다 주셨다. 알고 보니 유자 농사에 전복 양식도 하시는 70대 건강하신 멋진 '워킹 할머니'셨다.
가이드와 드라이브만으로도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잠까지 재워주신다며 댁으로 같이 가자고 하셨다. 이래도 되는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빈방도 있고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 하시면서 미안해할 것 없다고 우리를 데려가셨다. 상상도 못 해본 시골 인심이 이런 건가 어리둥절했다.
할머니는 열심히 바쁘게 살고 계신 것 같았지만 어딘지 외로워 보였다. 아들만 셋을 키우셨는데 이제는 다 출가해서 섬을 떠났다고 하셨다. 댁에는 말이 별로 없으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식사를 하는데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집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에 나올 법한 특이한 광경이 있었다.
집안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사이좋게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에도 거실에도 옥상에도 틈틈이 차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낯선 광경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많은 돌들은 뭔지 여쭈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단순했다. 돌이 이뻐서였다. 하지만 내 눈엔 주워올 만큼 이쁘지는 않았단 말이지.
할머니는 잠 잘 준비를 하려는 우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안내했다. 돗자리를 깔고 젊었을 때 얘기를 해 주셨다. 할아버지가 바람을 많이 피셔서 화가 많이 나서 그랬다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이쁜 돌들을 주워 집에 모아놓았다고. 집에 와서 돌들을 보면 화가 좀 풀리는 거 같았다고. 많이 지난 이야기여서 그런지 무덤덤하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돌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몰래 상상해 봤다. 바람 다시 펴봐 이 돌이 날아갈 수도 있어. 헉! 설마 이건 아니시겠지. 너무 나갔네 나갔어. 돌이 늘어날수록 미안한 마음이 커지셨겠지. 그러셨겠지. 근데 돌들이 무척이도 많았다. 그만큼 할머니 속이 많이 상하셨을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할아버지가 미워졌다.
그 뒤로 돌을 보면 청산도 워킹 할머니의 심정이 떠올려지곤 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나중에 결혼하고 남편이 바람피우면 큰 돌을 집에 쌓아놔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어마하게 큰 돌로 말이다. 결혼 17년 차인 지금 돌 주워 올 일은 아직 없었다. 다행인건가? 아니 미리 하나 주워다 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