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김정호
지난해 가을 일산으로 이사를 왔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비교적 한적하고 조용한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그것은 건넌방의 넓은 창문을 통해 여느 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노을을 저녁마다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된 꽤 넓은 농지가 창 앞으로 펼쳐져 있고, 고층 아파트나 높은 건물이 시야를 가리지 않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창 너머로 저녁노을을 처음 보던 어느 날, 불잉걸 같은 진홍빛을 토해내던 노을에 마음이 데고 말았다. 노을은 저녁이면 나를 창 가로 불러들였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서서히 마지막 붉은 빛을 토해내며 사위어질 때까지의 그 경이로움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노을은 멀리 지평선으로 서서히 몸을 기울여 초승달 눈썹 같은 모습을 남기다가 이내 무엇에 빨려 들어가듯 미끄러져 사라지곤 했다.
석양은 여러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을 가로지르던 강가에서 살이 까맣게 타도록 놀다가 마주했던 노을 깔린 저녁 어스름과, 그제야 종일토록 노느라 잊어버리고 있던 집 생각에 친구들과 부랴부랴 신발이며 옷가지들을 챙겨 들고 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던 강둑길을 떠오르게 한다.
중학교 시절이었던가, 우리 집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저녁나절 돌아오는 나를 보자 황급히 편지를 쥐여주고 달아나던 소년의 수줍은 볼은 노을을 등진 채 노을보다 더 붉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던 어느 날, 서해 바다 제부도쯤에서 남편과 함께 숙연히 바라보았던 해넘이를 떠 올리게도 한다.
사라져 돌아오지 않을 하루나 한 해, 혹은 인생의 긴 여정에서 아름다운 황혼과 노년을 맞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 늙어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나 슬픔보다는 경건함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녁나절이면 나는 집을 나와 논과 밭 사이로 나 있는 농로를 걷기 시작했다. 농로는 산책하기 좋을 만큼의 넓이로 잘 닦여 있었다. 온 하루를 내어 준 후, 마지막을 불사르며 눈부시게 사위어가는 해의 뒷모습을 더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그 모습을 눈과 마음에 담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벅차고 설레었다. 나에게 노을은 소멸의 안타까움이나 슬픈 감정보다는 텅 빈 충만감을 안겨주었다.
가만히 노을 속에서 삶을 반추해 보았다. 내 삶은 결혼 전과 후로 나누어진 느낌이 들었다. 결혼과 함께 나의 꿈들은 아쉽게도 모두 접을 수밖에 없었고 시부모,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온전히 나를 다 내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을 소진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내게 열정이 남아 있는 것일까. 조그만 뜨거움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멀어져 가는 노을 아래에서 온갖 상념들이 내 발길을 수없이 멈추어 서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을까. 먼지처럼 아주 조그만 불씨 하나가 내 안에서 따뜻하게 불을 지피며 올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조그만 불씨는 곁의 잔 불씨들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래 켜지 않고 방치해 두었던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려본다. 멀미처럼 울렁거리던 속내를 토해 내어보든 오래 묵어 각질 덮인 상처를 뜯어내어보든, 나는 그냥 써 보기로 한다. 조그만 불씨로 지펴졌던 나의 이야기가 뜨거운 불꽃이 되고, 그것이 다시 진홍빛 노을이 되어 나의 온 생을 뜨겁게 물들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