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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글쓴이 : 김정호    24-09-04 18:22    조회 : 3,299

장마

 

 

                                                                 김 정 호

며칠 사이 유난히 자주 비가 내리더니 주말 저녁에도 어김없이 지루하게 비가 내린다.

 

아주 오랜만에 집에 다니러 온 작은아들이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하여 서둘러 늦은 저녁 밥상을 차렸다. 불고기와 각종 나물 반찬들,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문어 숙회도 얼른 초고추장과 함께 올려놓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힘든 과정을 앞둔 아들은 요즘 들어 신경이 예민해져서 인지 표정 없는 얼굴에 수척함이 묻어 나왔다. 이 반찬 저 반찬 접시를 끌어다 아들 앞에 놓아준다. 옛말에 내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 좋은 것이 없다더니...나는 혼잣말을 한다.

친구들과 좀 과한듯하게 한 잔 하고 온 남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이쪽 저쪽 TV 채널을 돌리며 뉴스를 듣는가 하더니, 여느 때처럼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정치판 뉴스를 난도질하며 투덜거린다. 늘 들어온 얘기라 딱히 귀담아 들을 일도 없는 그런 얘기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부쩍 술이 약해진 남편은 술 끊으라는 내 닦달은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불러 주는 친구 있을 때가 좋은 거라고,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기운 달려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실 테니 그냥 내버려 두란다. 작년과 달리 올해의 주량이 많이 준 걸 보면 그 말도 맞기는 하다. 저 꼰대...나는 입을 비쭉거린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다소 내성적인 남편이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싸울 듯이 목소리도 커지니 입 다물고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다.

TV 속 기상캐스터는 다음 주 비 소식을 전하며 올 여름 긴 장마를 예고한다.

 

식사를 마친 아들은 거실로 가 앉는다. 술이 한껏 올라 보이는 남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듯하다. 공부만 하느라 그런지 유난히 융통성이 없는 아들은 워낙 제 아버지의 가벼운 주사조차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살짝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설거지 밀리는 걸 유난히 싫어하는 나는 싱크대 물을 시원하게 틀어놓고 그릇들을 부신다.

싱크대 앞 조그만 부엌 창문에도 빗방울은 토닥토닥 정겨운 소리를 내며 와 부딪친다.

 

과일을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수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저께 백화점 수퍼마켓에 들러 이것저것 찬거리들을 사다가, 커다란 수박덩이들이 눈에 들어와 발길을 멈췄다. 여름 과일 중에 유난히 수박을 좋아하는 나는 두 아들 출가 후, 부부만 남은 단출한 살림에 큰 수박덩이가 영 부담스러워 발길을 돌렸다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마침 큰 수박덩이 옆에 조그만 크기로 개량되어 나온 애플수박이 눈에 들어와 얼른 집어 들었다. 1~2인 세대가 먹기에 딱 안성맞춤이 크기였다. 그 때 사길 잘했다고 내심 흐뭇해하며 싱싱하고 빨간 속내가 드러난 수박을 알맞게 썰어 거실로 가져갔다.

 

8시 뉴스가 끝나면 9시 뉴스로, 9시 뉴스가 끝나면 그것도 모자라 뉴스 전용 채널로 돌리는 남편의 광적인 뉴스 사랑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나운서는 장마에 대비해 주의해야할 수칙 등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아래 지방 어딘가에는 호우 주의보가 발령한 모양이다.

곤한 몸을 못 이긴 남편은 이제 소파에 가로누워 가늘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 거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졸음을 못 견디는 듯 나지막이 들려온다. 아들은 준비하고 있는 논문의 진행되는 과정과 진로 방향에 대해 꽤 소상히 얘기해 준다. 딱히 힘이 되어 줄 수도 도와 줄 수도 없는 나로서는 단지 귀담아 잘 들어 주고 궁금한 건 물어봐 주는 게 할 일이다.

 

이제 가야겠다고 일어서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아들과 나란히 우산을 받쳐 들고 아파트를 나선다. 그칠 것 같지 않은 빗줄기에 가세라도 하듯 뿌옇게 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아파트 바로 앞 큰 길 사거리까지 걸어 나오는 길도 온통 안개로 깔려있었다. 달리는 차들도 행인들도 별로 없는 적막한 한여름 밤거리 풍경이다.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아들은 파란 신호등 불로 바뀐 사거리를 황급히 건너간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아내며 멀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우산살이 두어 개 쯤 꺾여 내려앉은 아들의 우산 탓일까 아들의 어깨도 조금 쳐져 보였다.

 

올해는 정말 장마가 길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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