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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섭하게 듣지 마세요    
글쓴이 : 김경숙    25-09-23 10:51    조회 : 1,888
   섭섭하게 듣지 마세요.hwpx (68.2K) [0] DATE : 2025-09-23 10:51:01

섭섭하게 듣지 마세요.

 

 

김경숙

 

늦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여름 뙤약볕에 버스정류장의 지붕 그늘은 엉뚱한 곳만 비껴보고 있다. 든든한 마음으로 조계사 점심시간에 맞추어 151번 버스를 기다린다. 조계사 만발 공양간을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요즘은 일주일에 3~4번 이상은 꼭 들른다. 매주 목요일엔 템플스테이 자원봉사를 하고, 시간이 날 때면 참선방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점심 공양 시간은 1140분부터 1240분까지다. 처음 절밥을 먹었을 때는 평소 챙겨 먹지 못했던 채소, 나물이 가득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잠깐, 시간이 지나자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밥이 점점 맛이 없어지지?

식단은 늘 비슷하다. 사중에 큰 행사가 있거나, 매월 초하루에는 국수가 나오고, 복날에는 콩국수가 나온다. 그 외에는 비슷한 반찬 구성이다. 어르신들이 많아서인지 음식 간도 심심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식판을 내려다보며 반찬 가짓수를 세어본다. 삶고, 볶고, 무친 반찬 8가지. 전부 김치류와 나물이다. 반찬엔 죄가 없다. 그저 제맛을 낼 뿐인데, 다양성을 따지며 불평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투덜대는 마음을 달래본다. 찜통에서 찐 밥은 질척하다. 질척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맛을 느껴보려 했다. 반찬도 하나씩 집어 재료 본연의 맛을 느껴본다. 콩나물 대가리의 아드득거림, 줄기의 지물거림, 삶은 깻잎에 감춰진 질긴 식감, 막 버무린 겉절이의 아삭함. 그 작은 변화를 느껴보려 했지만, 습관은 무섭다. ‘그래도 맛이 없네, 이건 싱거워서 그래라는 생각이 금세 올라온다.

식사를 마치고 참선방으로 향한다. 지난 6월 참선 입문 교육을 마친 후로 조계사 참선방을 꾸준히 이용하고 있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심심할 때 갈 곳이 있다는 것. 거기서 나름의 놀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태어난 나이와 상관없이 죽음의 시점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이 들수록 삶은 점점 더 무료해진다. 그래서 취미를 찾아 도서관이나 문화센터를 기웃거리지만, 곧 다시 지루해진다고 말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어느새 그 대열에 들어섰다. 이 땅에 태어나 유일하게 애국한 일이라면 아들 둘을 낳아 국방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는 것. 그 아이들은 지금 각자 경기도에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해 살고 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도 보고 식사하며 대화를 나눈다. 지난달 모임에서 큰아들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엄마의 노후에 대해 상의해야 할 것 같아. 섭섭하게 듣지 마세요. 앞날이 분명해야 서로 편하니까요.”

 

섭섭하게 듣지 말라는 말이 오히려 더 섭섭했다. 내가 벌써 그런 나이인가? 잠시 상실감이 몰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아들을 바라봤다.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큰아들. 내 눈에는 아직도 어린애 같은데, 어느덧 아저씨가 되어가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내가 아들을 챙겨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내 노후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신기하기도 했다.

거울 속에서 주름이 늘어가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어렴풋이 노후를 떠올렸지만, 막상 대놓고 묻는 물음 앞에서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도 이제 그런 걸 생각해야 한다며 가르치듯, 그러나 자연스럽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에서 책임감이 느껴졌다.

기억은 과거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중에 당연히 엄마랑 살아야지 했던 놈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자 친구가 생기더니 생각도 변했다.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 앞에 주춤거리는 내가 더 구식인지도 모르겠다.

내 부모 세대는 자식이 보험이었다. 그런 대화는 아예 필요 없었다. 노후 복지가 부족하던 시절, 자식 중 하나가 부모를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식이 노령 연금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내 보험은 내가 들어야 한다. 자식 입장에서 부모의 노후가 궁금할 수도 있다. 책임감 탓에 마음이 무거울 수도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와 이삼 일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노후는 걱정하지 마라. 부모 신경 쓰지 말고 너희가 결혼하면 너희 편한 데서 살아. 굳이 내가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조계사 다니기 좋은 서울 어딘가로 할 거야.”

 

갑자기 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확고하게 정리되는 게 있었다. 하루 한 끼를 2천 원에 해결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면서 심심하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오늘도 수필 합평을 마친 뒤 조계사 행 버스에 오른다.

오늘은 콩국수다. 게다가 무료 공양이다. 공짜는 언제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음식 재료가 일찍 떨어졌다는 것. 국수 위에 올라가는 채 썬 오이가 벌써 바닥난 모양이다. 하얀 사발에 희멀건 콩 국물이 국수를 가득 덮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종이컵에 담긴 열무김치를 두 개나 가져와 콩국수에 얹었다. 색감이 살아났다. 구수한 콩국수에 아작아작한 김치를 얹어 먹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네가 내 셋째 자식이다. ~ 콩국수가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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