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아내
천영순
“우리 중국에 가서 살까?”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가끔 대형 이벤트를 만드는 나 때문에 놀라는 건 남편과 아이들이다. 연초에 내가 툭 던진 그 한 마디가 현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젠 편안히 안주할 때도 되었건만 낯선 중국 땅에 가서 파견근무를 하겠다고? 가족들은 이런 나를 이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 일이다. 우리 인천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중국대학에서 받는 어학연수생 선발에서 미끄러진 경험이 있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 한 가닥 미련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 때 필기시험 합격자 중 여직원이 혼자뿐인 나는 여성우대를 부르짖던 그 시절 꿈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 중국의 치안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인지 필기시험성적이 좋지않아 서 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얼마전 중국어 수준을 평가하는 HSK((??水平考?)시험제도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으로 응시한 결과로 얻은新HSK 4급(중국의 이공계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는 수준, 6급이 최고 수준임) 증서가 내게 중국파견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것이다. 그래서 지금 인천시의 자매도시 톈진시(天津市) 한 복판 빈수이다오(?水道) 톈진시 관광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누가 말했던가?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꼭 이루어진다고.’
1980년 인천시 공무원채용시험에 합격하여 ‘놓인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신조로 동사무소, 구청, 시 사업소, 시 본청에서 두루 근무했다. 가장 힘이 든 때는 섬으로 발령이 났을 때 였다. 영종· 용유 지역이 경기도 옹진군에서 인천시 중구로 편입된 지 몇 년 후인 1994년 6급으로 승진하면서 용유동 사무소 사무장으로 발령이 났다. 노인복지업무를 담당하면서 공무원 생활 중 가장 열심히 근무한 때였다.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관리를 못해서였을까?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대한민국의 관문이지만, 그 때는 도서벽지근무수당을 받고 일 하던 곳이었다. 출퇴근하는데 버스, 전철, 여객선, 통근버스 등 온갖 교통수단을 이용하여야 했다. 아침 6시 20분에 집을 출발하면 8시 50분에 가까스로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섬에서 근무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승진축하는 고사하고 동료들로부터 왜 네가 그런 오지로 쫓겨 갔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가장 난감한 일이었다. 때마침 부평구가 커져서 분구되어 섬에서 근무한지 1년만에 집 가까운 계양구로 발령을 받았다. 도서벽지 근무를 경험한 이후 나는 어떤 곳에 발령을 받더라도 뭐든지 다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일한 곳은 새로 만들어진 부서, 통폐합된 부서가 많았던 것 같다. 부서 이름조차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 쉽게 알아볼 수가 없는 곳이다. 전통적 요직이 아니고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부서라서 일까? 사회복지업무의 새로운 개념인 주민생활지원과, 민원실과 자치행정과를 통합한 민원자치과와 전국최초로 만들어진 구청의 여권과 등이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사무관으로 승진하면서 동장으로 일할 때이다. 국가의 총수는 아니지만 주민대표와 함께 관할동의 일을 의논하며, 동행정의 주요사안을 결정 해나가는 것은 정말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동주민들이 모두 모인 동민축제에서 연설을 하고, 명절에도 빠짐없이 매주 부녀회원들과 독거노인들의 밑반찬을 장만하여 방문하는 일은 지방행정의 최일선기관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의미있는 일이다.
가정에서는 뜻하지 않게 충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결혼 직후 남편에게 말했었다. 집안일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내게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역할을 기대하지는 말라고. 그러나 직장에서 결혼 전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 후 나는 직장생활에 지장이 될 만한 일을 한 가지씩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주간에는 육아, 야근이 필요하면 호출 즉시 출동이 가능한 파트타임 아이 돌보미,집안청소 도우미 등 . 한 때는 내 봉급보다 그 비용이 더 많이 나간 적도 있었다. 나도 몇 사람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우리 엄마는 최고의 요리사!"라고 말했다. 의도하지 않게 매번 같은 재료를 써도 다른 모양, 다른 맛의 요리가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칭찬에 남편은 이의제기도 못하고 고개를 살짝 돌릴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학교급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게 웬일일까? “엄마 그 요리는 이런 맛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이후 나는 부엌에 가는 횟수도 적어지고 내가 만든 음식의 맛도 점점 떨어졌다. 어느 날 작은아이가 물었다. “엄마 학교에서 엄마를 소개하는 글을 써 오라고 하는데 엄마가 자랑하고 싶은 게 뭐에요?” “음... 맨발로 등산하는 엄마 어때?” 라고 내가 말했다. 남편은 퉁명스런 어조로 “가끔 해외여행을 혼자 다니는 엄마!” “에이, 다 창피해요.” “그러면 마라톤을 완주한 엄만 어때?”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다면서요?” “그래도 완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2002년 처음 연수원동기를 따라 중앙일보마라톤에서 10킬로미터를 뛰었다. 2003년 에는 하프코스를 두 번 뛰었고, 용기를 얻은 나는 그 해10월에 춘천마라톤에 참가했다. 춘천마라톤을 왜 환상적이라고 하는지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쯤 뛰다가 힘들면 회송하는 차로 오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호반을 둘러싼 인간 띠, 자원봉사자들, 길가의 주민들의 함성소리가 모두 나를 응원하는 소리로 들렸다. 아마도 연예인들이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물 한 컵, 바나나 한 조각, 찰떡파이 하나를 얻어먹기 위해 달리는 모습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짐승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좋고 나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렇게 30킬로를 무난히 뛰고 나니 끝까지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꼭 ‘완주’라는 선물을 주실 것으로 굳게 믿었다. 가족들은 내가 언제 회송차에서 내리는지 기다리다 완주한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 동장으로 근무하면서 도보순찰을 많이 하여 체력단련이 되었는가 보다. 마라톤완주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하던가? 한 번 마음에 꽂힌 것이 있으면 여건을 따지지 않고 꼭 해 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엄마이자 철없는 아내. 어찌 되었든 그런 철부지 덕분에 남편과 대학생 두 딸이 중국현지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1년간 해외 생활을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철부지 아내가 언제 철이 들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