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문 수
김수환 추기경님!
이 시대의 큰 어른 스테파노 추기경님!
주님의 부르심에 초연히 응답하신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 하십시오' 이르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이웃집에 놀러가시듯 미소 지으며 저희들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것 같은 가벼운 발길로 여행하듯 하느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토록 평안하셨다는 추기경님.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저희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이어져 그리스도인에겐 희망의 문턱이요,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는 굳은 믿음을 주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범인(凡人)들에게 죽음을 차분히 맞을 수 있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보여 주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에의 희망을 주시고, 죽음까지도 구원의 빛으로 맞으셨습니다.
죽음으로 한반도의 별이 되신 추기경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다는 T.V 뉴스를 듣고 한참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돌아가셨을까?' 믿기지 않아서 아내 체칠리아에게 말했다. 그분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늘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쉽게 우리를 두고 떠나실 분이 아니라는 의리감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잔잔한 미소로 살펴 주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소한 일상에서 진실을 가르쳐 주시려고 손짓하셨기 때문이다. 공기를 마시듯 나도 모르게 그분의 사랑을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만인의 연인으로 사셨다.
내가 가까이서 추기경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중반쯤이었다. 서울 신림동 성당으로 견진성사 집전을 하시고자 오셨을 때였다.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에 일일이 손을 마주잡고 누구에게나 친절히 답례를 주시던 추기경님. 머리엔 자색 빵모자(Zucchetto), 가슴에는 큰 십자가가 잘 어우러져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그때 나는 신림동 성당 전례(典禮)부서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3백여 명의 견진성사 준비로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바쁘게 움직였다. 추기경님 환영 순서가 끝나고 곧바로 미사가 진행되었다. 추기경님께서 미사 중에 하신 힘차고 단호한 강론 말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강론 말씀이 자상하고 소탈하게 이어지다가 엄숙하고 준엄하게 바뀌어 갔다.
"...이 성스런 성당 안에 지금도 우리 김승훈 본당 신부님과 나의 말을 엿듣기 위해 파견된 형사님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계시다면 직책에 충실하십시오. 직책상 책임은 좋든 싫든 누구나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사님! 우리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말이 올바른 양심의 소리라 생각되면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등의 말씀이 이어지며 사회정의와 인권수호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시겠다는 선언을 하셨다. "누가 감히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당하게 핍박(逼迫) 할 수 있습니까? 천부 인권을 누가 무슨 권한으로 짓밟으려 합니까?" 인권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가는 가운데 당시 군사정권에 대한 질타(叱咤)였다. 모두 몸을 움츠리고 살던 시절에 군사정부와 싸우던 양심 투사로서의 추기경님 말씀은 모두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신림동 성당은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이 본당 주임을 맡고 계셨다. 이분은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활동하고 계셨기 때문에 늘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후 추기경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들 안에 사셨다. 언제나 힘없는 민중의 대변자로, 고통 받는 이의 위로자로, 핍박받는 이에겐 방패막이가 되어 고뇌에 찬 삶을 사셨다.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나눔의 기쁨과 희망을, 그리고 용서와 감사의 삶을 주시고 하늘나라로 떠나 가셨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메시지 앞에, 메마른 저의 마음도 잠시 멈칫거리며 자신을 돌아보게 한 추기경님! 그 분 사랑의 말씀은 힘이 있었다. 이웃을 돌아보게 했다.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사랑의 언어를 일깨우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감히 그 분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결심을 주셨다. 그 분은 스스로 촛불과 같은 삶이었기에.
아내 체칠리아와 추기경님을 뵙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판교 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묵주기도를 올렸다. 추기경님의 평소 자애로운, 장난스럽고 소탈한, 경건한 모습이 엇갈리며 다가 왔다.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세종호텔 사거리에 당도했다. 추모인파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추모 행렬에 놀랐고 가톨릭 신자로서 가슴 뭉클했다. 아내 체칠리아에게 승용차를 부탁하고 명동입구에서 내렸다. 매서운 찬바람이 뺨을 스쳤으나 춥지 않았다. 추모대열의 끝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인파와 얼굴을 마주보며 걷고 또 걸었다. 골목길과 언덕배기 인도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인간 띠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 줄로 늘어선 추모인파!
뜨거운 추모열기!
그들은 변해 있었다. 어제의 각박함은 찾을 수 없었다. 바쁘게 쫓기며 서성이는 인파가 아니었다. 어둡고 지루함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위안과 배려가 오가며 사랑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이가 벌어져도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묵묵히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뭔가 간절히 염원하는 자세!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다짐을 걷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 하세요."
추기경님의 마지막 말씀을 음미(吟味)하는 듯 했다. 선한 목자를 잃은, 정신적 지도자를 잃은 슬픈 대열. 의지할 곳이 없는 군중들의 고독한 행렬이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고자 추기경님께로 저 높은 종탑의 십자가를 향하여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뜨겁고 진지한 이 추모열기!
그 착한 행렬의 여유로운 변화는 무엇일까?
왜 이러한 돌발적 현상이 명동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한반도를 숙연(肅然)히 뒤흔든 일련의 신드롬(Syndrome)!
누가 무엇으로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죽음!
나는 그동안 어떤 삶이었나?
남은 여생은...
추모대열 흐름에 따라 2시간 만에 명동 성당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으나, "교우되시는 분은 교육관 강당에서 연도(煉禱)로 추기경님 조의를 대신해 주시고, 일반 시민들에게 대열을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자의 호소에 따라 연도를 바치고 추기경님을 뵈올 수 없었다. 아쉬움 속에 그 분의 환영은 머릿속을 계속 맴 돌았다.
추기경님의 선종 애도축제는 5일간의 장례를 마쳤는데도 계속되고 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정의와 사랑에 목말라하는 이 군중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