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시간이 지나면 모두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도 않는 것까지 파도에 쓸려 내려가도록 만드는 그런 것. 어떤 때는 아무것도 지나갈 것 같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인간실격을 읽었다. 인간실격에 나오는 요조의 독백 - 지금 저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다 지나가리라. 지금까지 아비규환처럼 살아온 소위 인간세계에서 진리라고 느낀 것은 단 하나 그것뿐 이었습니다. 다 지나가리라. - 이 독백은 나에게 믿음 이상의 것이었다. 신앙이었고 살아갈 힘이었고 성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간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기억도 있었다. 정말 내가 지우고 싶었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만의 심연을 가지고 있다. 당신에게 해를 가해 가해자가 되어버린 나 역시 피해자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심연 앞에서는 평등하다. 나 역시 심연 앞에서는 피해자이다.
나는 심연을 경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심연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나의 심연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던 사람이었다. 심연이 나의 몸을 파먹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스스로 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그들의 세계는 한순간에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롭게 세계를 건설했다. 몰락하는 자들은 몰락을 택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몰락하기 전 그들의 세계가 유리였다면 몰락할 수 없는 나의 세계는 댐 같은 것이다. 댐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댐은 조금씩 붕괴되고 붕괴된 자리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살아왔다. 댐이 붕괴된 자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아니, 어쩌면 웃음을 흘리고 자기연민을 뚝, 뚝 흘리며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