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하게. 그때 나의 내부에서는 무엇인가가 무너졌다. 눈물을 흘린 진짜 이유는 내가 할아버지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해를 끼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더 잘 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과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는 죄고 실은 실이다' 라는 논리로 맞대응 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가해자에게만 득이 되는 사과로 잘못을 틀어막으려 하는 것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갚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종류의 무너짐은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도 가끔씩 있었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날 미꾸라지를 손에 쥐고 달리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미꾸라지를 죽였다. 달리기를 하며 손에 쥔 미꾸라지의 꿈틀거림이 점점 잦아들어가던 그 느낌을 기억한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무너지던 느낌 또한 기억한다. 그럼에도 1등을 하기위해 달리기를 계속하던 기억 또한 살아있다. 마지막에 미꾸라지를 물에 풀어주라고 할 때 내 미꾸라지만 물에 둥둥 떠다니던 기억. 옆에 서있던 친구가 그 광경을 보고 선생님께 '쟤가 물고기 죽였데요'라고 외치던 기억. 선생님이 나를 달래주던 기억. 중학교때 힘을 과시하려고 옆자리 친구를 때리던 기억. 왕따 당하던 친구에게 다가가려다 더 심한 상처를 주던 기억까지. 나는 항상 가해자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내 안에 무언가는 어김없이 무너졌다.
학교 다닐 때 '가해자는 잠을 자지 못한다' 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반대이다. 가해자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는다. 그러나 심장 속에서 떨고 있는 그 무언가는, 알에서 갓 깨어난 새 같은 그 무언가는 가해자에겐 없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곳에서 죄는 필연적이다. 누구나 죄를 짓고 살아간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상대방은 그 사과를 받아주며 그렇게 산다. 그들은 모른다. 화해란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자기 만족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는 자신이 지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이 사과의 참 뜻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피해자에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은 이미 피해를 입었는데, 상처받았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그 상처를 지울 수 없는데, 흐르는 시간만이 상처를 지워줄 텐데. 사과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또한 그런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언가를 무너뜨리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무너지는 무언가를 보며 담담하게 웃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