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한 단상(斷想)
요즘 사방 천지에 커피숍이다. 남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고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지만 어찌됐든 저 먼 이국땅에서 전 세계를 돌고 돌아 우리나라로 건너온 이 기호식품은 100년 만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입양아가 되었다. 고종황제가 덕수궁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신 이래 , 이제는 왕도 아닌 돈 없는 백수도 동네 도서관 자판기에서 300원을 투입하여 커피를 즐길 수 있으며 나 같은 평범한 회사원도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경복궁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 쇼파에 앉아 저 찬란한 고궁 야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대학생 시절. 난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국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심이였다. 나의 하루일과라고 하면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하루종일 그 곳에 머문다. 공부를 열심히 안했기에 “머문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당연히 수험생으로서 취미생활도 없고 동아리 사교모임도 없다. 보이는 것은 책이요 뒤돌아 보면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경쟁자 수험생이다. 공부를 쉬면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한 나날의 연속이였다. 그러한 나날에서 날 구원해준 것은 바로 커피였다. 경쟁자 수험생의 한 마디. “커피 한잔?” 나와 경쟁자는 커피를 핑계로 쉬는 시간을 확보했다. 아침에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머리를 맑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커피를 한 잔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졸음을 몰아내야 한다는 이유로 커피를 한 잔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밤늦게 까지 공부하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커피를 한 잔 했다.
한참 책과 씨름하다가 쉬고 싶을 떄가 있다. 하지만 쉼에 대한 명분이 없다. 화장실이 급하면 그 핑계를 댈 것이다. 머리가 지끈 아프면 약국에 가서 타이레놀 하나 사먹겠다는 핑계를 댈 것이다. 하지만 쉬어야 하는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럴때면 옆에 앉아있는 경쟁자 수험생이 내게 말 한마디 붙여줬으면 한다. “커피 한 잔?”
사회초년생 시절. 모든 것이 익숙치 않고 힘겨웠다. 직장 상사들이 마치 군대 시절 훈련소 조교같이 두려웠다. 군기가 쎘던 회사 분위기로 우리 입사 동기들은 항상 얼음장 같은 무표정으로 출근했고 사무실에서는 경직되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인조 로봇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속으로는 웃었을 것이다. 너가 더 로봇같다.
어느 오후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기들은 뻣뻣하게 각을 잡고 사무실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이 지긋한 부장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너희들 왜 그렇게 심각하게 앉아있냐. 나가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와라.” 그 말 한마디가 나와 동기들에게 구원이였다. 회사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커피 4개를 사들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로보트에서 잠시나마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커피를 핑계로 우리들은 사무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팔백원 짜리 캔커피 하나씩 먹으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등산을 꽤 좋아한다. 게으른 탓에 먼 산에 가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가봤자 북한산이다. 등산가들은 산을 타기 전에 등산장비를 챙긴다. 스틱은 기본이고 배낭, 해드핸턴, 모자, 장갑 등 한보따리이다. 그러한 장비들 사이에 꼭 끼는 것이 있다. 보온병과 믹스커피다. 이 두 개는 식품이라고 하기보다 장비이다. 매서운 찬바람 다 맞아가며, 무릎 관절 고생을 다 시키고 백운대에 올랐을 때 내 육체에게 해 줄 수 있는 보상은 뜨근한 믹스커피 뿐이다. 백운대 정상에 꽂혀 있는 대형 태극기 밑 앉을 만한 바위에 자리잡고 앉아 미리 준비한 보온병에 커피를 타고 한모금 맛을 본다. 백운대 바위에서 마시는 이 커피는 과도한 음주로 속이 뒤집어진 숙취환자에게 있어 고추가루 풀은 콩나물국이요 , 육군훈련소 훈련병들이 기나 긴 행군 이후 마시는 마스타 음료수이다. 자칫, 커피를 준비못하고 온 등산가들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그들은 부러워할 뿐이다.
거리마다 커피숍이 넘쳐나고 손님들을 유혹한다. 한국 사람에게 아니, 우리 인류에게 커피는 무엇일까. 고대 커피를 재배하던 아프리카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커피 농사를 시작했을까. 커피가 정말 맛있어서 마시는걸까. 아니면 커피 안에 들어가있는 카페인이 중독성이 있기에 다시 찾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커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쉼"이다. 책을 읽던, 노동을 하던, 산에 오르던 간에 중간 중간 쉬어 갈 떄 커피가 필요하다. 그냥 쉬는 것은 조금 밋밋하다. ‘쉼’이라는 식재료에 맛소금 같은 존재가 바로 커피다.
우리나라 커피소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성인 한 명 당 소비하는 커피의 양도 1년에 3.38 kg 이다. 대한민국 성인이 1년에 338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 물론 잔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 세계적인 커피전문점이 우리나라에 앞다퉈 진출하고 모두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언뜻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2016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어른들이 이토록 커피를 퍼 마시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고단하고 지쳤기 때문이리라. 왜냐하면 커피와 "쉼"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