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전 쯤 중국 북경에 2년 동안 거주했었다. 중국 생활을 회상할 때면 떠오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한 가지가 술이다. 수많은 중국의 술 가운데 소호도선(小糊?仙)이라는 고량주가 있는데 그 주원료는 물 고량 소맥이고 산지는 귀주성 인회시(仁懷市)이다. 이 술은 고량주 특유의 화학성 짙은맛이 덜하고 감미롭고 깊은 풍미가 곁들여져 부드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또 그 이름이 갖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 때문인지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붉은색 종이상자에는 '소호도선'이라는 술 이름과 함께 '총밍난 후투껑난(聰明難 糊?更難)', 즉 ‘총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리숙하게 보이기는 더 어렵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한다(酒不醉人 人自醉)’라는 술에 대해 달관의 경지에 이른 주선(酒仙)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아리송한 부연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저번 광동성(廣東省)의 주도인 광저우(廣州)로 출장을 갔을 때 한 만찬장에서 그 아류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년호도(百年糊塗)'라는 고량주와 조우했다. 마오타이 등 중국의 유명한 술과는 달리 이 술도 소호도선과 마찬가지로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맛과 향 모두 말마따나 ‘띵하오(?好)’ 훌륭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소호도신(小糊?神) 소호도성(小糊?聖) 등 ‘호도(糊?)’라는 단어가 든 유사한 브랜드의 술도 있다고 한다.
중국어 사전에서 호도(糊?)는 ‘어리석다, 멍청하다, 애매하다, 흐릿하다’ 등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 우리사전에서 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한자어 호도(糊塗)는 ‘사리에 어두워서 흐리터분하거나 어떤 사실을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호도(糊?)와 호도(糊塗)은 끝 한 글자가 서로 다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도(?)와 도(塗) 모두 간자체 도(?)로 표기되고 있어 결국 두 단어가 같은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중주인 소주에는 대부분 깨끗하고 밝고 맑은 이미지의 이름이 붙어 있기 마련인다. 그런데 왜 중국인들은 그들의 대표적인 술인 고량주에 굳이 어리석고 흐릿하고 애매하다는 의미의 호도(糊?)라는 이름을 붙이는 걸까? 언젠가 북경 사무실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 할 때 한 친구가 불룩 나온 다른 동료의 배를 가리키며 ‘저 친구 배는 인격이다’라는 농담을 건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남산처럼 불룩한 배를 훤히 드러내 놓고 해탈한 듯 초연한 모습의 포대화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까?
소위 ‘얼짱’이나 ‘몸짱’에 열광하며 외모지상주의로 치닫는 요즘 우리 세태에서는 배가 조금만 나와도 자기관리에 실패한 루저(loser)로 호도되기 십상이다. 반면 배 나온 이를 오히려 인품이 높다고 추켜 세워주는 중국인들의 배려의 미덕이 싫지 않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고량주하면 백년호도(百年糊塗)니 소호도선(小糊?仙)이니 하는 어찌 보면 조금은 장난기 어린 중국의 술 이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럴때면 포대화상처럼 달관한 듯 초연한 미소가 저절로 입 언저리에 맴돌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