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들이 단풍 축제를 벌이고 있다. 일요일인 오늘은 마침 4,9일 마다 열리는 모란 오일장날이다. 집 앞 정류소에서 백현마을과 태평역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모란시장으로 향한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니 지척이다. 단조로운 일상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이 모란장에 미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신혼 때와는 달리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게 마음이 너그러워진 아내가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며 교회에 갈 채비를 한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부부간 애정의 척도인양 여기던 피앙세에 대한 관심, 때론 너무 과해서 집착이나 구속이 되기도 하는 그 관심이 조금씩 느슨해져 가나 보다. 아니면 아량이 넓어지는 건가?
모란시장 건너편 정거장에 버스가 정차하자 승객들이 우루루 몰려 내린다. 평소처럼 지하철역 부근은 도로 가장자리까지 차치한 노점상들로 비좁아 보이고, 지하도 건너 장터 쪽은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인파의 물결이다. 고령화 탓도 있겠지만 모란 전통 오일장터는 그들만의 천국처럼 온통 노인들이다.
이층 건물로 새로 지어진 모란시장 상가에는 과일, 생약초, 고추 배추 등 농산물, 생닭 견육 등 각종 식료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털 뽑힌 생닭들이 양 다리를 하늘로 쭉 뻗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좌판 과일들은 햇살을 받아 원색의 고운 빛깔이 더욱 선명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장터 한쪽 철창 속에서 생과 사의 순간을 기다리던 식용견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동물보호단체들과 소위 보신탕 문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면서 2016년 말 상인들이 개 보관 도살 시설을 모두 자진 철거키로 성남시와 합의했기 때문이다.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 즉 천부인권을 넘어 이제 동물에게까지 권리가 확장되는 시대다.
복개천 위 도로를 건너면 오일장터다. 모란시장은 1962년경 대원천변에 난전 형태로 형성된 것으로 초기 이주자 김창숙씨가 고향인 평양 모란봉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1990년부터 대원천 하류 복개지 공영주차장에 장이 서는데 최대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든다고 한다.
기존 시장 옆 여수 공공주택지구내 면적 22,575㎡ 주차장 부지에 상하수도, 전기시설, 다목적지원센터, 화장실, 공연장, 휴게 공간, 야간 조명탑 등의 시설을 갖춘 장터가 조성되어 2018년 2월부터 장날이면 상인 680여 명이 장판을 벌인다고 한다.
장터는 크게 진입부의 할머니 장터, 농수산품, 공산품, 음식류의 4개 구역으로 나뉜단다. 농수축산물, 화초, 약재, 공산품, 의류, 잡화, 식기류, 화장품, 삶은 옥수수 도넛 사탕 빵과 같은 주전부리 등 온갖 종류의 물건을 파는 임시점포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된 장터에 무질서한 듯 조화롭게 들어서 있다.
리어커에 가득 실린 노란 모과에서 나는 내음이 진하고 향그럽다. 전기드릴로 타일에 구멍을 뚫어보이는 공구 가게 앞에는 구경꾼들이 몰려있고, 손님 몇몇이 마주앉은 포차에는 꼬막무침과 함께 탁자 위에 놓인 '목포' 낙지가 꼼틀댄다.
우엉, 둥글래, 여주, 도라지, 헛개, 인동초, 우슬, 느릅나무, 뽕나무 뿌리, 물 건너온 베트남산 노니 등 열매와 뿌리 식물들이 놓인 좌판대, 그 앞에 몸에 좋다는 각종 효능들이 적힌 안내판이 손님들의 눈을 끌며 오래 그 앞을 머뭇거리게 한다.
약초가게 상인은 "평소 절대 뒷짐 지지 마세요! 앞으로 손을 내밀어야 무엇이든 좋은 것이 들어옵니다."라며 커다란 탕기에 노니와 약대추를 넣어 막 다려낸 뜨끈 달짝한 음료를 판매대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 잔씩 권한다. 염증을 없애주고 혈액순환을 돕는다는 등 효능을 줄줄이 나열하는 그 상인의 말에 이견을 달거나 트집을 잡을 곳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진한 바다 내음이 코 속으로 파고드는 완도 돌미역, 새끼줄에 엮여 영광에서 올라온 굴비, 가평에서 온 다슬기, 어느 하천에서 건져올렸을 가물치 메기 붕어 잉어 뱀장어 빠가사리 참게, 서해에서 왔을 새우, 자라와 개구리 등 비릿한 내음의 수산물도 종류가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다.
장터 안쪽으로 몰려있는 국수 가게들은 사람들로 빈자리가 드물다.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양 효능이 빽빽이 적힌 팻말을 세워두고 지네 액 캡슐을 파는 곳, 개 다섯 마리가 오소리 한 마리와 사생결단 결투를 벌이는 영상을 틀어놓고 오소리 성분이 든 약을 목이 터져라 선전하는 곳에도 신기한 듯 사람들이 몰려있다.
번듯하니 너른 천막과 간이의자 객석까지 마련된 공연장 안은 발디딜 틈이 없다. 발 뒤꿈치를 들고 보니 엿장수 각설이패가 장구와 북 단출한 악기로 만들어내는 신명난 장단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다짜고짜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폄하하며 스스로 자신을 추켜세우는 걸쭉한 입담이 코믹하고, 노래와 춤까지 선사하며 관객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건네는 두어 장 지폐에 절로 신명이 나는가 보다. 저런 신명은 미치지 않고서야 나올 수가 없어 보인다. '미쳐야 미친다'는 어느 책 제목처럼 그 무엇엔들 미치도록 좋아하지 않고서야 어찌 미칠(reach; 닿다; 미치다)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일렁이는 밀림이다 가만 서 있어도 밀려다니는 발이 얽히고설킨 뿌리 같아 <'모란장' 부분, 최경자>
시인의 말처럼 모란장은 사람으로 일렁이는 밀림이고, 그 밀림의 나무들은 서로 뿌리가 얽히고설켜서 살아간다. 나는 멀찍이서 그 밀림에 가느다란 뿌리 한가닥을 살짝 걸치고 있는 작은 화초 한 그루라고나 할까?
삶은 옥수수 두 개, 도톰한 등산 티와 겨울용 등산모자 각각 하나, 아내가 얘기하던 삭힌 고추 한 채반 등이 담긴 검정 비닐봉지 서너 개를 손에 들고 길 건너 골목에서 벌교 꼬막 한 봉지를 더 사들었다. 원주산 진한 칡즙 한 잔으로 갈증을 풀고나서야 온전히 시장을 빠져나왔다.
'고향 내음이라도 맡으라고 사왔지'라는 내 너스레에 아내는 '번거롭게 만든다.'며 눈을 한 번 흘긴다. 그러면서도 손수 삶고 껍질 한 쪽씩을 떠어낸 꼬막 속살에 간장 양념을 얹어내는 아내의 정성이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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