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기억
고담/ 정 종 원
차이
추억과 기억의 차이란 무엇이라 보는가? 스쳐간 일에 그리움이 남으면 추억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억인가? 나의 지난 날 들을 뒤돌아보니 추억거리보다는 가슴 아프고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많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가슴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프고 좌절되었던 고약한 기억들만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펼치고자 하는 일보다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많았다. 살다보면 슬픈 추억이나 좋은 기억도 있을 수 있다. 허지만 추억은 모두 기억 할 수 있지만, 기억은 모두 추억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레테 강
내 아이디는 <건망>으로 시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유난히 건망증이 심해서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부터 놀림거리의 대상이 되거나 조롱거리가 되는 수가 많았다. 기억이 떨어지면서 건망만 늘어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새로운 단어를 익히면 내 기억은 전에 알고 있던 단어를 하나씩 몰아낸다. 재앙인가? 아니다. 양적으로 폭주하는 기억으로부터의 자위 수단으로 건망의 기능을 작동시킨다. 건망이 그렇듯이 치매도 지나치지 않으면 차라리 축복이겠다. 이승에 겪은 일 다 기억하고 어떻게 떠날 것인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미워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잊어버리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그리스 인들은 저승 앞에 망각의 강 레테가 있다고 믿었다. 사랑했던 사람 이름 하나씩 잊어버리는 것은 재난인 것만이 아니라 축복일 수도 있겠다.
황혼 추억
정권쟁취는 곧 이권탈취이라는 통치철학을 가졌으니 온갖 뒤탈 많은 불법 행위로 초라한
미래를 자초했다. 형제들이 돈이라면 흡혈귀처럼 달려들어 탈탈 털어먹었으니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이 대한민국에서 당신만큼 출세한 자가 어디 있으며, 재복(財福)을 가진 자가 어디 있고, 행운을 누린 자가 어디 있느냐? 대임을 마치고 황혼 길에 마누라 손잡고 강변을 거닐며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추억하고 싶지 않았을까? 늙음의 종착역은 찬란하고 명예로웠던 때를 회고하는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지금은 흐뭇한 추억에 잠길 여지는 간 곳 없고, 생의 마무리는 추하게 더럽게 함몰되고 말았구려. 아니 말년 꼬락서니가 안팎곱사등이 굽도 젖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네. 당신의 호사는 대통령 할 때까지야. 불행한 일이다. 그 많은 돈 어찌하고 갈려고. 아등바등 살아봐야 기껏 백년도 못사는 주제들이.
사람 기억
벌써 반세기가 지난 일이지만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고향이 경주라며 월남 갔다 온 최 병장. 1969년에 대통령의 3선으로 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찬반 국민투표가 있었지. 중동부 전선은 투표일 10월 17일은 야간에는 여간 추운 것이 아니다. 그때 군인들은 100% 찬성표를 해야 당연한데 끝까지 최 병장은 <반대> 찍었다. 전 부대원을 팬티 바람에 연병장에 세워놓고 최 병장을 몽둥이 타작을 한 다음 기절을 하면 내부 반에 몸을 녹인 다음 또 매 타작을 잔인하게 행한 중대장 H대위. 그래도 최 병장은 끝까지 <반대>를 했다. 평소 왜소하고 허약해 보인 그의 외양과 달리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았던 한 사내의 기개와 심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나는 다행히 부재자 투표권이 부대에 도착하지 않아 투표권 행사를 못했으나, 아마도 매가 무서워 비급하게 <찬성>했을 것이다.
어르신
이 시대의 어르신. 탤런트 이 순 재 씨와 대학 동문이요 동기로 알고 있다. 그는 거부에서 신용불량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인생을 살아온 시대의 풍운아였다.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남은 인생은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그것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말하며 행동하는 어르신.
-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 세대를 절대 봐 주지 마라.
-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 하 면 썩는다.
재벌급 부자로 살다가 어느 순간 무일푼에 신용불량자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살아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이 시대에 진지한 어르신을 찾기가 어렵다.
우연히 기회에 채 현국 어르신(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 분과 동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만도 나의 축복이요 추억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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