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의 고백
중학교 시절 도덕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날은 엄마를 주제로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선뜻 손을 들어 발표할 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선생님은 연희에게 말해보라고 청했다,
평소 누구보다 어른스럽던 맨 뒤에 앉은 연희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처음엔 쭈뼛쭈뼛하다가 어쩐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아침에 엄마가 아파서 병원을 가셔야 되는데 콩나물국 끓여놨으니까 챙겨먹으라고 하셔서 순간적으로 화를 내고 나왔는데 그게 너무 속상해요” 말하면서 점점 흐느끼다가 책상에 엎드려 우는 바람에 듣고 있던 우리도 당황하면서 같이 위로했었다. 이후 다음 순서로 발표하는 아이들도 나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때 연희의 말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서 아직도 ‘엄마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존재인가’라는 자문과 그래야 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연희엄마가 연희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내 아이들에게 그러하지 않으면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든다.
엄마가 늘 아빠에게 야단맞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엄마처럼 어른답지 못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리석고 단순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무책임한 어른으로 살지 않기 위해 내 나름대로 자립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텼던 것 같다. 내 신변의 크고 작은 문제들도 엄마에게서 답을 찾을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다. 그냥 혼자 해결해야했다. 늘 엄마는 엄마의 문제가 제일 크고 해결할 수 없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도 엄마없이 외할머니에게서 자랐다고 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구박데기로 살다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열여덟에 부산으로 시집온 것이었다. 이웃의 소개로 “금순아, 부산으로 시집가서 살아라” 그 부산이라는 말만 듣고. 아무리 그 시절엔 선도 안보고 시집간다지만 11살이나 더 많고 귀도 한 개 없고 눈도 사팔뜨기 신랑감이라니.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을 어린 것이 엄마 없다는 이유로 시집 올 자리겠냐 싶지. 그나마 다행으로 시댁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왕손이라고 늘 읊어대던지라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안쓰럽고 애처러워서 예쁘다 예쁘다 하셨다. 부모복이 그렇게도 없는지 그 사랑도 시어머니는 시집 온지 백일 남짓 되었을 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큰아들 돌 되기 전에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가풍이고 인품이고 물려받을 새도 없이 남편만 의지하고 살아야했다. 남편 또한 그도 그럴것이 머리에 새똥도 안 벗겨진 철부지를 색시로 맞으려니 기가 막히기도 했겠지. 결혼식 전날에 도망가려고 하는 큰아들 손을 붙잡고 “어미가 다 가르쳐줄테니 혼인은 해야 한다”고 유언처럼 애원하는 말씀에 그래도 효심이 가득한 아들이라 뿌리치지 못하고 등 떠밀려 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서둘러 며느리를 볼 계획으로 흠 많은 아들이긴하나 그래도 장손이니 떡두꺼비같은 아들 손주 하나 낳아줄 며느리감을 알아본 것이라는 걸 뒤에 알았다.
그렇게 아들 딸 낳고 남편 말 잘 듣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늘 앙숙처럼 아버지는 엄마를 혼내고 엄마는 늘 도망 나가서 나에게 아버지 시중을 들게 했다. 질긴 악연은 모두에게 괴롭기만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아버지는 68세에 당신아버지처럼 하루아침에 돌아가시고서야 끝이 났다.
내 자식을 친정부모님에게 맡기고 맞벌이하러 다시 전직장에 복직하면서 내가 자랄 때 진저리쳤던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남편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더라도 싸우지 않으려고 입 꾹 닫고 살았는데 어째서 내 새끼들 돌보면서도 여전히 부딪히고 큰소리를 내는지 너무 원망스러웠었다. 정말 내가 나가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악을 쓰면서 울고 말렸을 정도로 엄마는 나에게 마음을 나누기엔 너무 힘든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교과서에 나오는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내 이상이었는데, 그냥 나를 버리고 자식과 남편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살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남편이 객지로 떠도는 직업 때문에 아이 셋을 젖동냥 하듯이 시댁 친정 오가며 내가 데리고 살다 양처도 못되었다. 부부란 한쪽팔만 흔들어서는 날아오르기는커녕 바닥으로 도로 처박히고 만다는 것을 20년 동안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알게 됐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충실했으니 반은 얻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읽게 된 막내의 일기장을 보고서야 현모도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 속에는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엄마는 없었다. 그저 닥달하고 마음에 생채기만 내고 못 알아주는 엄마만 덩그러니 새겨져 있었다. 과거 어릴 적 나처럼 그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평가하고 후벼파는 바쁘고 날카로운 다가갈 수 없는 엄마였구나 생각하니 허무하고 섬뜩하기까지 했다. 이제라도 많이 안아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도 엄마를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추억이 없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첫째 낳고 산구안 해준다고 친정에 머물렀을 때 빨래며 미역국이며 수발을 다 들어 주었었다. 엄마도 우리 셋 놓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해서 하지정맥류에 허리디스크에 고질병은 다 있었으면서 당신새끼가 지새끼 낳느라 힘들다고 자기 몸 돌보지도 않고 그저 사랑하나로 아무런 계산없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엄마 없는 것은 어떻게든 표가난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우는 것도 자는 것까지도. 어깨도 축 늘어져있고 행색은 까칠하며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울 때도 크게 울지 못하고 잘 때도 사지를 쭉 뻗고 못잔다
작년 봄 우연히 길고양이 두 마리를 한 달 간격으로 분양받아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한 마리는 갓 태어나 버려진 것을 캣맘이 3주 동안 밤잠 안자가며 키운 녀석을 데려온 수컷이고, 또 한 마리는 그 놈 예방접종 시키러 동물병원에 갔다가 되려 한 마리를 더 얹어서 데려 온 암컷이다, 사연인즉, 왼쪽 눈 내막이 붙은 채로 상가건물에서 허둥거리던 녀석을 발견하고 자세히 보려고 쪼그려 앉았는데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는 커녕 얼른 다가와서 손이며 다리며 부비더라는 것이었다. 그 길로 병원에 데려와 개안수술도 하고 중성화수술도 했지만 그 곳에서 두 달 동안이나 입양처를 기다리며 갖혀 지냈다고 내게 보여줬다. 회복실 문고리를 열어주니 역시나 나에게 와서 부비고 배를 뒤집어 애교를 부린다. 나를 언제 봤다고. 제발 좀 데려가서 키워달라는 캣맘의 부탁으로 앞뒤 따지기도 전에 반 이상은 벌써 마음이 가 있었다.
우리집에 먼저 온 녀석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아기인데다가 캣맘 집에서 다른 성묘 두 마리 밑에서 한가족처럼 임시보호로 키워서 그런지 둘째가 오니까 냉큼 다가가서는 건드려보고 핥아주고 따라하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에 비해 둘째는 먼저 있던 놈이 저보다 어리고 약해보이니까 내 무릎에 앉아서 자리를 차지하려 첫째를 견제하며 으르렁 거렸다. 살기 위해 습득한 본능 일 것이었다.
지금도 두 마리를 관찰하다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첫째는 스스럼없이 우리가족이건 낯선사람이건 발걸음마다 따라다니며 애교부리는데, 둘째는 구석으로 들어가서 배고프거나 내가 오는 소리가 들려야 나온다. 그리고는 항상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눈치를 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행복한 가족이라는 뒷배가 얼만큼 중요한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것을 내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버텨내고 있었다. 세딸이엄마인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있는 엄마였는데 정작 아이들과 남편이 바란 건 세심하고 푸근한 엄마와 아내였던 것 같다. 아니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야 하는 것 일까.
엄마는 하늘이란다. 나의 하늘은 무엇이고 나는 또 어떤 하늘로 남게 될까? 힘들고 막힐 때마다 답을 찾기 위해 먼 길을 헤매지 않아도 해답을 잘 찾을 수 있는 길로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고 기도한다.
나는 너희들의 엄마니까. 하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