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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글쓴이 : 나경호    24-10-05 11:32    조회 : 1,637
   2.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hwp (130.5K) [0] DATE : 2024-10-06 15:49:51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나경호

 

  토요일, 일요일도 반납할 정도로 일에 몰두해 있었다. 1 년 동안의 삶이 그랬다. 최근에서야 집중해 왔던 일을 마무리했다.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잠도 더 자고, 일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열심히 살았다면 보상을 기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책상이나 TV 앞에 앉아 있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늘 피로하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 운전 중에 졸음과 싸워야 할 때도 자주 있었다. 앞이마도 더 넓어진 것 같다.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다. 평소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치아에도 문제가 생겼다.

  앞니가 흔들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쉽게 낫질 않았다. 치과를 수 차례 방문했다. 칫솔질도 더 철저히 해야 했다. 내 체력이 다해가고 있다는 경고인가? 이것이 나에게 보내려는 신호는 무엇일까?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렇다면,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다.

 

  어느 날 새벽 3 시경이었다. 꿈을 꾸고 있었는데 너무도 선명한 느낌에 갑자기 눈을 떴다.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의식이 깨어있어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멍하니 PC 앞에서 한 시간째 앉아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야 할 생각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일어나 보니 아침 8 시 반이었다.

  아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도 스마트폰 알람을 주말 패턴에 맞추어 놓아 그때 일어난 모양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이 지나, 도로는 한산했다. 마음은 엑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고 싶지만, 앞선 차의 꼬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늦잠을 잔 덕분에 50 km를 졸지 않고 운전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소 늦은 출근이 머쓱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환경 시료 측정을 주업으로 하는 곳이다. 이외에도 폐수처리 약품 제조나 통합환경대행업을 겸하고 있다. 나는 회사에서 품질 관리와 통합환경을 맡고 있다. 시험에 필요한 품질 문서를 개정하고 교육하며, 통합환경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회사는 올해 초 ISO 17025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한 바 있다. 국제 공인 기관이 되면 시험표준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시험성적서를 발행할 수 있다. 15 년 경력의 ISO 17025 전문가인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무엇보다 보상도 있어 의욕을 가지고 임했다.

  인정 준비에는 ISO 17025 규정에서 요구하는 27 개의 절차서를 마련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절차서에 필요한 서류는 100 여 종에 달하며, 요건에 맞게 작성해야 한다. 서류작성이 끝나면 모든 시험업무를 이 서류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게 된다.

  내부 심사와 경영 검토, 국제숙련도 시험 참여, 측정 불확도 보고서 작성 등 여러 일도 동시에 수행해야 할 일이다.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통상 15 개월 걸리는 작업을 10 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빠른 인정서 획득에 모두가 만족했다. 그런데 쉼 없이 달려온 탓에 후유증도 있었다.

 

  연초, 대표실에 인사차 방문했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대와 우려가 섞인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점과 부하직원들과의 정보 공유 부족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나를 보고 공무원처럼 일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일을 할 때 추진력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대표와는 다른 성향이다. 호흡이 잘 맞을 때는 시너지가 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불만이 쌓이기도 한다. 대표와 나 사이에 마음의 앙금이 생기면서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어느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나의 표정은 상기된 채였다.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졸음쉼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졸음 껌을 씹어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한번은 졸음운전 중 건널목 신호등을 들이받은 적이 있다. 더욱이 아내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호등이 넘어지면서 차가 충격을 흡수해 큰 사고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을 하며 정신을 바로 잡아본다. 가까스로 졸음쉼터에 도착하였다.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핸들을 잡는다. 수면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경고음이 들려온다. 열심히 일하여 얻은 성과는 일한 자에게 최고의 보람이다. 그러나, 몸에 이상이 생겼다면 그 성과는 건강과 맞바꾼 셈이 된다. 더욱이, 주위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여 얻은 성과라면, 그 또한, 진정한 성취라고 할 수 없다.

  종일 눈이 내렸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겨울바람은 한반도 상공에서 북태평양 기단의 습한 기운을 만나 눈송이를 만들어 냈다. 대지 위에 순백의 무늬를 펼쳐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은 땅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눈은 순백색 아름다움을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물이 되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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