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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으로 살다    
글쓴이 : 진연후    19-10-06 19:20    조회 : 426

기다림으로 살다

진연후

“생명선이 엄청 길어요.”

학원에서 조선생이 손금을 봐 준다며 하는 말이 생명선이 깨끗하게 길어서 건강하게 오래 살겠단다. 오래 산다고? 하긴 단명하기엔 이미 많이 살았으니까. 이룰 일도 없이 뭐하며 오래 살아? 게임에서 패하진 않았지만 이긴 것도 반갑지만은 않다는 듯 투덜대는 내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십 년이요? 십 년을 어떻게 기다려요?

“뭘 기다려요. 그냥 있으면 돼요. 십 년, 생각 안 하고 있으면 금방 가요. 지난 십년을 생각해 보세요.”

일 년짜리 적금이나 하나 들까하고 은행에 갔는데 직원이 비과세라는 십 년짜리 보험 상품을 권했다. 그럼 앞으로 십년을 꼼짝없이 일을 해야 하는 건가. 로또에 당첨되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 아마도 그때까지 계속 일을 해야 하겠지만 괜히 이것이 발목 잡는 듯한 기분도 들고,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지난 십년을 생각해 보라며 열심히 설명하는 직원 말에 거절이 어려워 가입한 상품은 벌써 중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고 난 여전히 출근을 하고 있다. 학원 강사를 그만 두고 싶다고 투덜댈 때면 친구는 적금을 들어보라고 했다. 삼 년짜리 적금을 들어두면 적금 붓기 위해서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덜 할 거라고. 하지만 난 오히려 적금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즐겁던 일도 지루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내일이 궁금하지 않고 계획을 잡지 않는 스스로에게 지쳐가는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아이들과의 수업 시간이 그나마 내가 정기적으로 기다리는 일이었다. 수업 준비로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읽어올까, 이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기대하고 약간은 설레기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매년 반복되는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스물다섯인 두 남자가 선술집에서 만나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삼십대의 사내가 끼어든다. 그들에게는 기다릴 일이 없다. 사내는 아내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기다림이 없어졌다. 스물다섯인 두 남자는 자신들이 늙은 것 같다고 한다. 늙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스물다섯 살 나이와 상관없이 그들이 늙었다는 건 관심 있는 일이 없고, 삶에 의욕이 없다는, 그래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다는 뜻이란다.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니? 10년 후엔 어떨 것 같아? 질문이 끝나자마자 시끌시끌하다. 우선 공부에서 해방되고 엄청 자유로울 거라고. 공부만 아니면 어떤 것을 하고 있든 재미있고 즐겁게 살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라고 분위기 깨는 정답을 외치는 아이가 하나쯤은 있기도 하다. 암튼 입을 모아 빨리 그 시간이 왔으면 좋겠단다. 십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시인이 현실에서 누구를, 무엇을 기다렸는지 상관없이 우리는 이 시의 화자가 연인 혹은 민주화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으로 시를 감상한다. 화자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든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열정적인 젊은이일 거라는 아이들의 해석에 뜨끔하다. 지나온 반백년에 그렇게 가슴 아리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나? 가슴 두근거리며 간절히 기다리는 젊은 시절이 있었던가? 그저 시간만 흘러갔던 건 아닐까.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무엇을 기다리느냐고. 사실 지금 그다지 간절히 기다리는 건 없단다. 너도 늙었구나.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시선이 갑자기 내게로 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선생님은요? 이럴 때 간절한 기다림이 없어 꼼짝없이 몇 배 더 늙어 버리고마는 선생에게 아이들은 고민 시간을 오래 주지 않는다.

“우린, 미래가 아주 길~~게 있다는 것 자체가 전부 다 기대되는, 기다려지는 것들이죠.”

“지금 기다리는 건 빨리 수업 끝나는 거구요.”

기다릴 것이 없어 늙는다면 오래전에 늙어버렸다. 간절한 기다림이 없어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면 난 이미 오래 살았다.



한국산문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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