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너무 오랜 시간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 공직 생활과 농사일을 같이 하신 아버지는 오남매를 모두 대학 졸업까지 뒷바라지 해주셨다.
맏딸인 나는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바쁜 농사철에도 한 학기에 두 번씩은 딸을 보러 서울에 올라 오셨다.
기숙사 면회시간은 오후 6시에서 7시까지고 방송을 통해 각 방으로 연결 되었다. 화학 실험을 끝낸 후 지저분해진 가운을 손에 들고 힘없이 기숙사에 들어서면 목이 빠지게 딸을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는 딸을 보자 너무 반가워 입을 못 다무셨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전남 장흥을 출발하여 광주에 들러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신촌까지 버스를 타고 오셨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와 대학정문을 지나 언덕배기에 있는 기숙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힘들어 보이는 큰 가방에는 보따리가 세 개였다. 한 개는 반 건조한 피문어를 담은 바구니, 그리고 두 개의 보따리는 김부각과 소고기 볶음 고추장이다. 아버지는 반 건조한 피문어 다리를 가위와 가는 칼을 이용해 여러 가지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 오셨다. 옛부터 예쁘게 오린 피문어는 제사상과 잔칫상의 꽃 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왜 힘들게, 오린 피문어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정성이 많이 담긴 귀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고 말씀 하셨다.
예쁜 바구니에 담아온 말린 피문어는 사감선생님께 드리고 김부각과 고추장은 친구와 방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사감 선생님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아버지가 면회 오신 그날은 밤 9시에 하는 각방 점호시간을 2시간 연장해 주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나를 종로 신신백화점 뒤에 있는 한일관에 데려가 노란 불판에 담긴 맛있는 육수 불고기를 사 주셨다. 아버지는 몇 점 드시다 말고 고기를 내 앞으로만 밀어 주셨다. 고기를 다 먹고 남은 육수 국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식사 하면서 아버지는 용돈은 부족하지 않냐고 물어 보신다.
그 당시 한 달 기숙사비는 삼천오백원이었는데 매달 칠천원을 보내 주셨다. 거의 시내 외출이 없다보니 용돈 쓸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돈 관리도 확실하다면서 칭찬해 주셨다. 시간이 촉박하여 나는 기숙사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연희동 친척 집에서 주무시고 이튿날 새벽 일찍 시골 집으로 내려가셨다.
그즈음 아버지는 오십이 조금 넘은 연세였다. 흰 머리도 늘어나고 얼굴에 주름도 패이고 허리도 조금 구부정해지셨다. 아버지도 많이 늙어가고 계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거대한 산이었고 항상 그 자리에 굳건히 서 계실 줄 만 알았던 철없는 딸이었다. 유난히 새침하고 애교도 없었던 나는 부모님께 감사해요, 사랑해요 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소심한 딸이었다. 아버지는 3남 2녀를 키우시면서 아들들에게는 무척 엄하셨고 딸 둘은 한없는 사랑으로 키워 주셨다.
학창 시절에 유난히 로버트 프로스트의 영문시를 좋아 했던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여자들도 반드시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며 나를 이과를 선택하게 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영문학은 너무 광범위해서 더 힘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으로서 집 안의 대소사와 자식들 뒷바라지로 너무나 힘들고 외로우셨을 아버지! 이따금 두 눈을 감고 양손에 호두를 만지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신 아버지를 볼 때는 가슴이 철렁 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부모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 싶었다.
자신의 건강은 돌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사신 아버지는 환갑을 한 달 앞두고 급성 심근 경색으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시다 돌아 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주위의 친척 분들은 오빠와 내가 어머님 모시고 동생들 뒷바라지 해야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매몰찬 말에 가슴이 더 아팠다. 오랫동안 슬퍼할 수도 없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너무나 변해버린 세상인심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오빠와 나를 의지 하며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셨다. 어느 날 엄마는 허리를 크게 다쳐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셨다. 휠체어에 엄마를 모시고 병실을 오가며 아버지를 너무 일찍 보내드렸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다. 부모가 자식에게 온 몸 바쳐 베푼 것은 당연하고 부모가 조금이라도 못 마땅한 점이 보이면 바로 따지는 못난 딸이었다.
아버지 기일 때면 반 건조한 피문어 다리를 동생들이 큰 가위로 오려서 조그만 접시에 올려놓는다. 손이 아파 예쁜 모양은 엄두도 못 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구니에 담을 정도의 양이면 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사감 선생님이 치아가 안 좋아 싫어한다고 꾀를 냈으면 아버지도 한두 번 정도에 그치지 않으셨을까?
어느 날 결혼한 큰딸에게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해줬던 것 중에서 제일 생각나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약국 하면서 항상 바빴고 아빠가 가끔 해줬던 달걀 비빔밥이라고 했다.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뜨거운 밥에 흰자를 빼고 노른자만 터트려 쪽파 간장과 참기름을 부어 비벼준 밥이 그렇게 맛있었다며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엄마보다는 아빠에 대한 추억이 훨씬 많다고 했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편 모습에 힘들게 피문어를 오려오신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