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전의 무게
김정희
바쁜 월요일 아침,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타 가시는 할머니가 오셨다. 한 달이 채 안된 것 같은데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신 할머니는 식전 식후로 나누어 하루에 여덟 개의 약을 들고 계신다. 그런데 이번 처방전에는 약이 두 개가 더 처방 되었다. 이유인즉, 혈압 당뇨 약에 잇몸약과 영양제를 추가해서 드셨는데 혈압과 당 수치가 조절되지 않아 병원을 다녀왔다고 한다.
광고방송에서 짧은 시간동안 선전하는 잇몸약이나 영양제는 소비자를 현혹시켜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한다. 특히 지병을 가지고 계신 장기 처방 환자들에겐 일반 약을 같이 복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 날 수 있다. 힘들어 하시는 할머니에게 빼곡히 적혀있는 처방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늘어난 숫자만큼 약사의 설명도 길어진다. 병이 위중한 환자에게 처방전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처방전에 길게 적혀있는 글씨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힘들어도 믿고 따르면 건강을 찾아준다는 주문이 적힌 생명의 지침서이다.
3월에는 뇌졸중 환자가 급증한다. 겨울동안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봄철에 발생하는 미세먼지, 황사를 들이 마시면 오염물질이 누적되어 혈관에 염증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벼운 뇌경색을 앓았던 할머니가 오랜만에 약국에 오셨다. 다행히 큰 후유증이 없어서 보행도 자유롭고 언어 소통에도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조금 어눌해진 말씨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종합병원 처방전을 가지고 오셨다. 빼곡하게 가득 채웠던 글씨들이 절반으로 줄어든 여백의 처방전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쓰러진 후 냉장고에 있는 젓갈류와 짠 음식을 모두 버리고 저염식과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이름도 생소한 건강보조 식품도 모두 끊었다고 하신다. 가벼워진 약봉투를 안은 할머니의 모습에 싱그러운 봄 향기가 실려 왔다.
손님이 뜸한 오후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아저씨가 힘겹게 약국에 들어오셨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웠는데 얼굴이 너무 검게 변하고 거동도 불편해 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호탕한 성격에 몸집도 좋았던 아저씨가 오랜 투병생활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다. 아저씨는 고혈압으로 인한 신부전증 환자로 오랫동안 약물치료를 해왔는데 혈압이 잘 조절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어 작년부터 혈액 투석을 받고 계신다고 했다. 저염식 하시고 날짜 잘 지켜서 투석 받으시면 투석을 끊은 환자도 주위에 있었다고 말씀 드렸더니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완치가 안 되는 질병 중에서 그래도 만성 신장염 환자는 바로 생명과 직결 되지는 않아서 십년이상 이십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위로해 드렸다. 약사가건네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환자의 치료 의지를 변하게 할 수 있음으로 약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한다.
약대생일 때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전문직으로서의 우아한 약사를 꿈꿨었다. 그러나 대부분 현실의 약사는 개국약사로서 약국안의 갇힌 공간에서 하루 종일 아픈 환자의 투약을 위해 싸워야하는 힘든 육체노동자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기계적 일상 속에서 처방전의 숫자와 싸워야 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복약지도로 약사는 가운을 입은 전투사가 되어야한다.
병원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약국간의 처방전 쟁탈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과도한 경쟁 속에서 영원한 단골은 없다.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약사로서 좌절하기도 한다. 집안 내외의 경조사로 마음이 기쁘거나 슬플 때에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웃으며 고객을 응대해야 할 때는 나도 연기하는 배우와 똑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토요일 오후 비가 내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조용히 일탈을 꿈꾼다. 고속도로를 달려서 넓은 들판을 지나 마침내 바다에 와 닿는다. 눈앞에서 출렁이는 바다는 나를 한눈에 알아봤다는 듯 무거운 내 어깨를 팔 벌려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