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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지줍는 할머니와 나    
글쓴이 : 김정희 투    19-04-02 16:27    조회 : 5,240

의약분업이 시작 되면서 약국은 처방전에 의한 조제와 복약지도로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한가한 날도 많지만 월요일과 토요일은 특히 바쁘다. 혈압약, 심혈관질환과 당뇨약 등 장기처방환자가 주말 지나고 거의 월요일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처방전과의 싸움이라서 그만큼 체력소모도 많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입도 뻥끗하기 싫은데 끊임없이 질문을하는 환자도 있다. 특히 많이 하는 질문가운데 하나는 혈압약 한번 먹으면 죽을 때 까지 먹어야하냐고 묻는다. 뇌졸중이나 심혈관질환 예방 차원에서도 드시는 약이니 저염식 하고 규칙적인 운동 하면서 의사 선생님과 의논해서 조절 할 수도 있고 또 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해준다.

분업 초창기에는 자잘한 실수도 많았다. 같은 건물 일층에 위치한 병원 진료 과목이 내과와 소아과이다보니 특히 소아과는 가루약과 시럽이 같이 나오는데 시럽제를 빠뜨린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혈압약과 당뇨약이 같이 섞인 장기처방전에서 마지막 한포에 약 한 알이 빠졌다고 전화가 오면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하였다. 환자 대부분은 심성이 착해서 다음날 약국에 들러 약을 받아 가신다. 까탈스런 환자는 집을 찾아가서 약을 전달하지만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손님이 빠져나가고 잠깐 한가해진 시간, 뒤쪽 의자에 약 봉투를 안은 채 할머니가 외롭게 앉아 계셨다. 간혹 오셔서 조용히 약만 타가시던 할머니가 조금은 의아 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겹겹으로 주름진 얼굴에 슬픔이 온 마음을 덮치고 있었다.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 놓으셨다.

이번 명절에는 아들, 며느리, 손자들도 다 귀찮고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이제는 좀 그만 살고 싶다고 하시며 눈물을 훔치신다. 세월에 꾹꾹 눌러진 할머니의 슬픔에 나도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 따라 울었다. 구부러진 허리를 간신히 일으키시며 약국을 나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배달 온 음식은 넘어가지 않고 바로 계속되는 복약 지도에 목이 메어와 설명 없이 약만 건네주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여전히 당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계실 수도 있겠고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 세상에서 그때보다 더욱 건강해지신 할머니를 한 번 더 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일 년에 두 차례 큰 명절이 지나면 많은 여성들이 소화불량, 두통, 방광염으로 병원을 찾는다. 많은 스트레스로 특히 방광염 환자가 급증하기도 한다. 약 먹고 며칠 쉬면 치료가 되지만 아직도 명절은 우리 여성들의 스트레스와 인내심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약국 주변에는 폐지 줍는 할머니들이 많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하시는 말씀은 자식들이 한사코 말리지만 용돈 벌려고 하신다는 것 이다. 자식농사 잘 지어놔도 자식 덕 볼일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노후는 물론 죽음까지도 준비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할머니들은 파스와 판피린 물약을 달고 사신다. 판피린 물약은 용량이 20ML로 감기 초기 증상에 간단하게 먹은 약인데 성분에 무수 카페인과 소염 진통제가 들어있어 매일 습관적으로 먹을 경우 중독성이 강한 약이기도하다. 좀 줄이시라고 해도 일하는데 활력소가 되니 어쩔 수 없으시단다. 가끔 제약회사에서 사은품으로 주는 파스를 따로 보관했다가 할머니들에게 드릴 때가 있다. 정색을 하며 돈을 지불 하겠다고 하신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잘 설명해 드리면 감사 하다고 하시며 가져가신다.

우리 약국은 두 명의 할머니가 번갈아가며 폐지를 가져가신다. 많은 할머니들이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병으로 일을 그만 두신다. 아침 일찍부터 밖에 나가 폐지를 줍다가 갑자기 비라도 만나면 흠뻑 젖은 옷에 비에 젖은 폐지를 들고 와 히죽 히죽 웃으며 슬그머니 약국 안에 밀어 넣고는 다음날 찾아가곤 하신다. 전산원 아가씨는 청소하기 힘들다며 짜증을 낸다. 그날도 갑자기 비가 쏟아져 할머니가 모은 박스를 하루 저녁 보관해 드렸다. 뒷날 오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며칠이 지나도 오시질 않았다.

깜빡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마음이 짠했다. 그 후로 들리는 소식은 할머니가 폐지를 줍다 후진하는 1.5톤 트럭에 치어 돌아가셨단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일하고도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어렵고 서러운 이웃들...

 

갑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에 고개 돌리며 이기적으로 살아온 내 삶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비오는 날은 금방이라도 젖은 박스를 들고 할머니가 오실 것 같아 자꾸만 밖으로 눈길이 간다. 사람으로 부대끼는 약국의 일상 속에서 편안함에 기대어 사는 나를 되돌아본다.


이화용   19-04-03 12:11
    
감동과 정보가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박재연   19-04-04 06:58
    
이웃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따뜻한 성품이 잘 느껴집니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머니를 만났다'고 하신 표현도 감동이고 인상적입니다. 계속 건필 파이팅입니다!!!
문영일   19-04-04 21:53
    
마음씨 착한 김 정희 선생님.
글은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만이 글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지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교회가서  항상 기도하지요.
오랜동안 글 쓰신 실력이군요.
자꾸 씁시다.

참. 팜피린을 줄이라는 이유를 추기하셨군요
잘 하셨어요.
글 가운데 '희죽희죽'.이라는 단어가  자꾸 좀  걸리는군요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보는 할머니 웃는 모습을 표현한
의태어로는 좀 그렇네요. 가만있자. 뭐 적당한 단어가....
'좀 계면적은 표정으로' 아니면,  '염치 없다는 듯 미안해  하며'
'쑥스럽고 계면적은 표정.'  이런 단어나 문장은 어떨까요?
유명 작가들도 거기에 맞는 단어 하나 찾으려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는  말 들었어요.

한가지 사실이나 현상에  꼭 맞는 단어는 딱 한개라 했지요.
하여튼 몇 번 안  쓰셨는데 참 잘 쓰세요.  정말!
다음 글 또 기대해 봅니다.
김정희 투   19-04-05 21:14
    
문영일선생님. 댓글이 늦었네요. 정말 단어선택이 어려워요.
희죽희죽대신 염치 없다는듯 미안해하며 로 바꿔보면  할머니의 자존심도 조금은 살리면서 글이 더 매끄러울것같아요 .  많은 지도와 격려 부탁드려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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