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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모의 풍선    
글쓴이 : 이동연    24-07-25 23:02    조회 : 5,439
  이모는 중매쟁이가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여자는 너무 많이 배워도 흠이었던 시절에 알맞게 여고를 졸업하고, 양친 밑
에서 신부 수업 중인 예쁜 처녀는 숱한 맞선 자리를 마다하더니 약대생 이모
부를 낙점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폐백을 올릴 때, 시부는 대추를 던지며 아들을 낳으면 이층
집을 사 주마 공언했다. 이층집이 영험했는지 이모는 금방 임신했다. 해산하러
친정에 왔는데 모두 기함할 말을 했다. 이모부가 청강생이란다. 갈라서겠단다.

  다음날, 안사돈과 함께 이모부가 왔다. 장남이 교수라서 가업은 차남이 물려
받기로 했단다. 대학은 맛이나 보란 거지. 약국 할 것도 아닌데 청강생이 뭐 
어때서. 동대문시장에서 내로라하는 포목점을 그깟 약국에 비할까. 중매쟁이가
쓸데없이 약대 이야길 해서 오해만 샀다. 당당한 해명에 슬슬 부아가 치미는데
  " 저 사람 놓치기 싫어서 말 못 했습니다. 평생 죄인으로 살겠습니다. "
이모부가 말했다. '사내답더라. 그래서 봐줬지!'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편네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데. 혹이라도 없으면 또 모를까. 내 배 아파 낳은
자식 떼놓을 수도 없고. 무슨 방도가 있나. 곁에서 산바라지하던 외숙모의 잦은
탄식이 주효했을까. 이혼하겠다며 펄펄 뛰던 이모도 한풀 꺾였다. 아들이란 조
건을 달았던 시부가, 딸을 낳았는데도 두말없이 사준 이층집도 한몫했으리라.
그렇게 청강생 사건은 무마되었다. 나머진 세월이 해결하리란 바람을 남기고.

  복기해 보면 시모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다, ' 학벌은요? ' 물음에 ' 약대 다
니던데.' 중매쟁이는 무심히 넘기고, 포목 도매상을 물려받을 거라 누차 강조했
던 말을 이모는 돈 자랑으로 여겼다. 사람은 원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정품과 사은품도 분간 못 하고 불량품이니 반품받아라 우긴 꼴이 되었다. 그
래도 이층집 사준 걸로 책임 다했다는 식의 시댁 태도는 언짢다. 원인 제공자이
면서 죄인 '코스프레'로 처가의 동정을 얻는 남편도 얄밉다. 시댁엔 뭐라 할 수
없고 만만한 남편만 타박하는데, 이모부는 늘 묵묵히 감내한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한 대가를 평생 침묵으로 갚으려는 걸까. 엄마의 속량 타령에도, 오뉴월에
서리라도 불러올 듯한 이모의 마음이 풀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커서 뭐 될래?' 물으면,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약사!'라고 대답하는 딸이
마냥 신통해서 이모는 묻고 또 묻는다. 사실은 '엄마는 왜 아빠한테 화만 내요?'
묻는 딸에게 ' 아빠보고 약사가 되라 했는데 말 안 듣고 할아버지 가게에서 일
하니까 화나서 그러는 거야.' 알려 주었다. 자기가 약사가 되면 엄마와 아빠가
화해할 거라 믿었던 꼬맹이는 자라서 약대에 진학하여 약사가 되었다.
  약국 개업식날, '소원 풀이했네!' 외척들의 덕담에 이모와 이모부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모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약국에 들락거리고, 이모부는 '셔터맨'이 되
었다. 자기 대신 짊어진 짐이 애처로와 시작했는데, 퇴근길에 같이 소주 한잔하
는 재미가 쏠쏠하고 부녀의 정도 도타워지는 것 같아 이젠 일과가 되었다.
  신약 개발에 매료되어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벌써 가게까지 사놨
더라. 말하기 전에 알아서 척척 해주니 고맙지. 근데 가끔 대학원 간 친구들이
부럽다. 걔들도 돈 많이 버는 자기를 부러워하겠지. 가끔은.
  "빛과 그림자는 등뼈가 붙은 쌍둥이라는 말처럼, 늘 좋기만 한 일은 없어.'
딸이 말했다. 문제 부부의 자식들이 일찍 철든다더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딸이 속 한번 썩이지 않았다고 자랑한 자신이 참 딱하다.
  " 나도 착한 딸을 만나면 그 아이가 내 꿈을 살아 주려나. 우리나라 참 재밌
는 나라야. 자식들이 죄다 부모의 꿈을 따라 살고 있으니."
  미소와 고소가 뒤섞인 딸의 얼굴이 낯설다. 술기운 탓일까? 숨어있다가 방
심할 때만 자라처럼 머리를 내미는 딸의 깊은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남의 꿈을 대신 살려면 자기희생이 따르는데, 자식이 제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
했으니, 부부가 쌍으로 물색없이 굴었다. 이제라도 아비 노릇 제대로 하리라.

  "약국! 한번 해봤으니까 됐다. 문 닫고, 니 일은 정희, 니가 알아서 해라."
이모부의 말에 이모는 고개만 끄덕였다. 간식이나 식사를 챙겨서 야국에 들르
면, 밥 한술 뜨다 활명수 한 병 팔고, 사과 한 쪽 베어 물고 파스 한 봉 팔고.
  열 평 남짓한 감옥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갈 앞날이 빤히 보였다, 후암
동 수재로 불리던 딸인데. 회의가 생기면서 '로망' 으로 빵빵했던 이모의 풍선
은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은 남편의 일침에 바람 빠진 풍선은
'빵'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터져 버렸다. 정희는 유학을 결정했다.

  공항검색대 입구, 정희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미자가 있다.
중 2때 단짝, 약국집 딸 미자는 동네애서 몇 안 되는 이층집에 살았다.
미자 아빠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어도 약사가운을 입고 1층 약국에 앉아 있
으면 빛났다. 2층 그녀의 방에서 놀 때면, 약과와 식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오던
미자 엄마는 언제나 빙긋 웃었다. 왜 지금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이모는 정희의 빈자리를 향해 크게 외쳤다.
  "정희야! 이제부터 진짜야. 너의 시간은 지금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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