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면 주어지는 '3대 자유'가 있다. 흡연, 음주, 연애...
흡연과 연애는 개인사지만 음주는 MT나 동아리 행사에서 함께 누리는 자유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 주로 마시는 술은 소주인데, 나는 소주를 안 마셨다. 소
주에 대한 불쾌한 기억(?)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권커니 잣거니'해야 빨리 친
숙해지는데, 과에 둘밖에 없는 여학생 중 하나가 소주를 안 마신다니 애가 탄
남학생들은 가게 주인에게 사정해서 위스키나 와인을 잔술로 구해오기도 했다.
미안하게도 나는 혼자서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곤 했다. 그리운 추억이다.
7~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스테스 영화'에선, 여자 주인공들이 실연
당한 후 자취방에서 속치마 바람으로 소주를 홀짝거리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청승의 극치라 질색이었다. 그때부터 불쾌한 술로 기억된 소주는 사절하고 와
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케팅협회에서 발간한 '광고'라는 월간지를 정기 구독
하면서 술의 역사와 '브랜드 스토리'를 알고 마시니까 와인이 더욱 좋아졌다.
지적 호기심과 술의 '콜라보'가 만든 시너지 효과 라고나 할까.
와인이 귀했던 시절이라 속칭 도깨비시장에서 알음알음으로 구해서,
운이 좋으면 미 8군 간호장교인 친구 덕으로 내자호텔 바에서 마셨다.
남보다 앞서 와인을 좋아했던 덕분에 나는 자천타천 와인 전문가가 되었다.
와인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선배 CEO 들이 와인을 좋아하는 거래처를
접대할 때면 SOS를 보내왔다. 그럴 때, 나의 임무는 저렴하면서도 취향 저격
인 와인을 고르는 '와인 소믈리에' 겸 와인에 얽힌 비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를 조성하는 윤활유 역할이었다. 좋은 와인을 공짜로 마시고 잠재고객 개발도
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대학선배 C 회장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파리법인의 최대 거래처인데 와인에 조예가 깊은 이 지점장이 와서 대작
좀 해줘. 주거래 은행 지점장님도 함께 모실 겸. 겸사겸사. 하하!"
함께 가자 해서 사무실로 갔다. 빌딩 지하에 있는 와인 저장고로 데려가 적
당한 와인을 서너 병 골라 보라 했다. '그룹' 회장님의 와인 저장고답게 귀한
와인이 꽤 많았다. 그중 눈길을 끄는 건 '샤토 무통 로쉴드 뽀이약 1996'.
프랑스 보르도 지방 지롱드강 하류에 있는 뽀이약 마을에서 1996년에 수확
한 포도로, '샤토 무통 로쉴드 와이너리'가 생산한 와인이다.
'샤토 무통 로실드'는 프랑스 5대 샤토로서, 1973년에 그랑 크뤼 1등급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장 콕토, 피카소, 샤갈, 웬디 워홀 등, 유명 아티스트의 작
품을 사용한 레이블로 '와인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생산년도 1996년 또한 손꼽히는 빈티지이니, 감히 꿈의 와인이라 할 만하다.
"이 지점장! '샤토 무통 로쉴드' 좋아해?"
내색은 안 했는데도 병에서 손을 못 떼는 걸 보고 눈치 빠른 C회장이 물었다.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 귀한 걸"
"그렇게 좋은 거야? 난 와인은 잘 몰라. 레이블이 독특해서 아껴 두었지.
이 지점장이 좋다니까, 이거 오늘 따야겠다. 당첨!"
그 와인이 얼마나 귀한 것인 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원님 덕에 나팔 불 기회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식사를 주문하고 C 회장이 와인을 꺼냈다. 와인 레이블을 보여주자, 주빈
'랑베르'의 눈이 커졌다. "엑셀런트'를 연발하며 감탄했다. 누구나 극찬할 만한
와인이지만 저렇게 좋아하니 와인 선택은 성공이다. 곧 경험하게 될 미각의
향연을 상상하는 순간, 랑베르가 유창한 우리말로 말했다.
"한우갈비에는 안동소주가 제격이지요. 우선 입가심으로 맥주나 한잔하고."
이게 웬일이야. 뭔 소주? 유창한 우리말을 칭찬할 겨를도 없었다.
한우와 와인의 궁합도 환상이라는 C 회장의 말에도 랑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와인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C회장은 멋쩍은 표정
으로 안동소주를 주문했다. 나는 태연한 척 표정 관리하느라 애썼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구석으로 밀려난 와인을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처
럼 소주 안 마신다 할 수도 없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
셨나. 씁쓸한 나와 달리. 산통을 깨버린 당사자는 식사 내내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사업 이야기도 잘되고. 완벽한 만찬이었다. 와인만 빼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랑베르가 구석에 있는 와인을 챙기며 말했다.
"이 와인,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정말 '컬렉트' 하고 싶었던 거요!"
아! 랑베르는 와인을 독점하고 싶었구나. 약은 놈! 욕을 먹어도 싸다.
좋은 건 나눠 먹는 우리의 미풍양속도 모르면서, 우리말만 잘하면 다야.
귀가하는 차 안에서 C회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이 지점장!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도 내심 기대했던 걸까? 일석이조의 기회를 날린 게 아쉬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