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별로 없다. 아주 어릴 때이기도 하지만 6학년 때 전
학해서, 졸업 후 교류하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자주 생각하고
함께 이야기해야 강화되고 오래 가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이 있다. 누구와 이야기한 적도 없고 되뇌어 생각지 않았는데도 생생한 기억.
초등학교 4학년 때 소풍 가는 날, 엄마는 도시락을 두 개 싸주셨다.
하나는 선생님 몫으로.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그날 나의 도시락은 특별했다.
2단 찬합의 뚜껑을 열면 유난히 두툼한 계란말이, 간장에 조린 박고지와 분
홍빛으로 물들인 '생선 소보로'를 포함한 일곱 가지의 속을 넣고 아주 굵게 만
김초밥이 꽃처럼 담겨 있었다. 일곱 가지 속을 넣고 굵게 만 '후토마키'가 복
을 부른다는 풍습을 따라 일본 사람들이 소풍날 갖고 가는 도시락이라 하셨다.
아랫단에는 소고기볶음과 흑임자를 넣은 유부초밥이 깻잎을 깔고 단아하게
앉아 있고. 양단 보자기로 찬합을 싼 후 꽃 매듭까지 지어 손에 쥐어 주시며,
흔들리면 밥 모양이 망가지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엄마의 소풍날이면 외할머니가 싸주시던 도시락이란다. 열일곱에 여읜 외할
머니의 추억을 담았으리라. 엄마의 당부대로 조심조심 걸었어도 마치 구름 위
를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부반장 엄마가 학교에 오실 때마다, 반장인데도
좀처럼 학교에 오시지 않는 엄마에게 야속했던 감정도 모두 가셨다.
점심시간이 되어 선생님들 식사 장소로 갔다. 담임선생님 곁에서 부반장 엄
마가 전기구이통닭, 과일바구니, 식당에서 맞춘 도시락 등으로 상을 차리고 있
었다. 전기구이통닭은 일 년에 한두 번 먹기도 어려운데 하는 생각에 갑자기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 초라해 보였다. 도시락을 내미는 손이 부끄러워 선생님
과 눈도 못 맞추고 자리로 돌아왔다. 보물찾기와 장기 자랑 시간 내내 속상했
던 마음은 빈 찬합을 챙겨주며 하신 선생님의 한마디에 봄눈 녹듯 풀렸다.
"어머니 도시락이 제일 맛있던데. 인기 최고였어. 고맙다는 말씀 전해 드려!"
전기구이통닭을 보자 시무룩하게 바뀌던 내 표정을 놓치지 않고, 마음 상한
나를 달래주시려는 배려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종업식날이었다. 남방셔츠가 담긴 선물상자를 선생님께 드리고 오라 하셨다.
'1년 동안 코흘리개들 뒤치다꺼리 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꼬!' 하시면서.
신이 나서 뛰어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열린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자,
부반장과 친구들 몇몇이 보였다. 선생님과 과외수업 중임을 직감했다.
갑자기 명치 끝이 아려왔다. '과외 같은 거 안 해도 맨날 전교 1등만 하는데,
뭐.' 위로해봤자 아린 가슴은 달래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설움을 억누르며
대문을 나서는 데 뒤에서 선생님이 불렀다.
"동연아! 너는 혼자 공부해도 언제나 전교 1등이잖아. 과외는 도움이 필요
한 친구들이 하는 거야. 알지?"
뒤돌아 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따뜻한 눈빛에 명치 끝의 통증은 씻
은 듯이 나았다. 똑같은 말로 스스로 위로할 땐 꼼짝하지도 않더니.
코흘리개 제자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어루만져 주시던 선생님의 눈
빛은 별이 되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반장을 해도 학교를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 일은 선생님에게 맡기고 학부모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기본 도리만
하면 되지, 과도한 관여는 속된 말로 치맛바람이라 여기셨다.
기본 도리란, 스승의 날, 소풍날, 종업식날에 '작은'정성을 챙기는 것이다.
하긴 빠듯한 형편에 기본 도리만 하는 것도 어머니에겐 벅찬 일이었으리라.
'종업식에 선물 하면 뭐해! 선생님이 바뀌는데. 새로 오시는 선생님께 해야
지' 하는 오빠에게 '그건 뇌물이야.' 나무라셨다. 대가를 바라거나 분수에 넘치
는 선물은 뇌물이라며 촌지와 엄격하게 구분하셨다. 어머니의 원칙을 이해하기
엔 너무 어렸던 나는 그저 선생님께 선물을 보낸다면 우쭐했다가 친구들의 더
큰 선물을 보면 풀죽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한마디로 이내 평정심을 되찾곤
했다. 동심에 상처 없이 나를 자존감 있는 성인으로 자라게 한 것은 어머니의
완고한 원칙과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었던 선생님의 사랑이었다.
스승의 날이면 특히 그때 그 선생님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