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
정 길 순
내 고향 고흥반도는 높지 않으면서 위엄이 있고 엄숙한 듯 하면서도 포근한 정을 느끼게 한 팔영산, 봉황산, 봉대산이 있다. 밭농사를 얼추 마무리할 무렵엔 신록의 향기에 도취되었고 들녘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미꾸라지 사냥을 나온 백로까지 날아드는 고요하고 청청한 곳이다.
타박타박 타박내야 너 어디 울고 가니
우리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 간다
물 깊어서 못 간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 못 간다 /산 높으면 비행기로.......
이런 동요를 구성지게 뽑아내며 못줄 구령에 맞춰 물댄 논에는 모심기로 바쁜 손들을 움직인다. 허리 펼 사이도 없는 고단한 모내기 품일을 했던 엄마는 돌 박이 동생 젖 줄 시간에 젖이 불어오면 애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내가 애기를 업고가면 엄마는 진흙탕물이 튄 얼굴을 동생 볼에 비벼대며 “내 새끼 얼마나 배고팠는가!” 멀건 젖을 벌컥벌컥 삼키는 애기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모습 이셨다.
만취의 불꽃같은 낙엽조차 떨구어 내던 고로새나무처럼 고생만 하시고 살다 가신 어머니에 대한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어제일인 듯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식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시키며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50여리 떨어진 고흥읍으로 이사한 후 사업에 매진 하셨지만 타향살이에 대한 텃세에 밀려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하시고 화친의 목적으로 시작한 노름이 화근이 되어 끝내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집을 나가셨다.
어머니 혼자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키우며 모진 고생을 하셨다 밤마다 아랫목에 아버지 밥을 묻어 두고 혹시나 발자국소리를 놓칠세라 문지방에 머리를 대고 밤을 지새우던 엄마 가슴은 이미 숯덩이였으리라! 추운 겨울 밤 군불지핀 구들장이 식으면 자식들 추울까 하여 문풍지에 부는 바람을 몸으로 막으셨다. 발이 빠지도록 눈이 쌓인 새벽길을 거르지 않고 오일장을 모두 누비며 돈벌이를 하시고 농번기철에는 삯 모내기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고운 때 딸인 나를 낳고 할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로 퍽이나 우셨는데 그 이후 죽 아들만 다섯을 낳았으니 양념 딸이 되어 버린 내가 어머니의 큰 의지였고 자랑이었다
어머니는“부모 잘못 만난 것도 서러운데 장래까지 망칠 수 없다.”며 막내를 낳은 산후통으로 푸석한 몸을 하고도 나를 서울로 보내셨다. 내가 상경하던 전날 밤 소슬바람조차 야속했던지 사립문 닫으시며 “어서 자거라. 새벽 차 놓칠라” 하시며 저무는 태양 같은 설움을 감추시며 따뜻한 물 한 그릇 떠줄 사람 없이 죽 사내만 둔 형편에 딸을 객지로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쉬웠을까
서울로 와서 공부 부터하고 싶었지만 고생하신 엄마 생각에 기술을 먼저 배웠고 몇 년후 작은 규모 이지만 이불제품 공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 47세가 되던 1월 초닷세 날 “언니, 이모가 돌아가셨데!” 미영이의 울먹이는 말이 마치 내게 마술을 거는 것처럼 들렸고, ‘아니야! 엄마가 왜 죽어. 잘 못 전달 된 걸 거야 ’하며 나 스스로를 달래며 기차를 타고 단숨에 달려간 고향땅 우리 집 지붕엔 하얀 저고리가 올려졌고, 어머니는 말 한마디 없는 주검으로 맞아 주셨다. 막내만 데리고 주무시다가 지병인 화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
꿈도 아니고 최면을 걸 수도 없는 현실 앞에 당신이 입었던 한복을 입고 상주 노릇 할 수 있을 만치 자란 나는 엄마를 그렇게 보내 드려야했다. 구정도 지났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북풍한설에 무덤가에 둘러선 어린상주들, 9살 막내의 울음은 “엄마는 왜 혼자 산에 두고 가요, 빨리 일어나요 엄마!”하는 외침은 산천도 목이 메게 했다. 젊은 날 자신의 방탕으로 고생만 시키다 아내를 먼저 보낸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은 돌아가신 엄마 만큼 나를 서럽게 했다.
엄마를 잃은 우리 가족은 아버지까지 내가 있는 서울로 이주하여 하루아침에 타향살이를 시작하셨고, 엄마와 살았던 시절의 가난을 고생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나는 主支 잃은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는것 처럼 내기억속에 엄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포기 하셨던 분이다 어쩌다 이웃집에서 가져온 맛난 음식도 자식들 먹이느라 외면하고 엄동설한 따뜻한 아랫목을 털고 세벽 바람을 안고 장에 가신 모습에서 두 세살 터울 애기들 출산으로 늘 배가 불러 있는 엄마가 창피하기도 했고 엄마노릇은 안할 거라고 다짐도 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떠난 자리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크고 작은 비바람과 파도에도 떠밀릴 수 없는 섬 바위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추스려야 하는 삶은 양분 없는 바위에 피어나는 천년 송 같이 힘든 삶이 맡겨졌다.
제산을 탕진하고 해결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빗 독촉이 이어지고 사춘기를 맞은 남동생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크고 작은 사고에 연륜 되며 나를 애타게 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형제들에게 엄마는 될수 없지만 엄마의 자리를 감당 할수 있었던 것도 형제들 모두 둥지를 틀고 가장이되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도 어머니의 깊고 넓은 사랑의 존재가 방향을 잡아주신 힘 이였다고 생각 한다.
어느 듯 세월이 흘러 누나를 따르며 시장길에 무거운 짐을 들어 주던 막내 동생은 불혹의 나이가 되어 사춘기 아들 딸 아빠노릇이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 다른 동생들도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으니 긴 세월 동안 엄마 없는 빈자리를 살아온 형제들의 가슴에 찬서리 같은 그리움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만 하다 나 역시 개구리 울어대던 초저녁에 툇마루에 앉아 내 딸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잡아주신 크고 묵직하고 거친 엄마 손이 보고 싶어서 그리움에 잠을 설치며 운 적이 많는데 하물며 내 형제들일까
어머니로 채우지 못한 형제들의 가슴에 누나가 대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처럼 형제들이 누나를 앞으로도 마음의 언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
“온달 같은 우리 엄마 반달 같은 나를 낳고 산이 높아 물이 깊어 못 오시나요, 저승길이 그 얼마나 멀 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