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계곡에서 밀주를 추억한다
정길순
광주친구들이 준비한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는 맛깔스런 김치와 나물로 쌍계사 계곡 입구에서 점심상을 펼쳤다, 엄마손 맛이 전수되어 세월과 함께 익어가는 내 친구들한테 추억 속에 맴돌고 있는 어머니의 향기가 베어나고 내 나이도 무게가 느껴진다. 쌍계사 계곡물은 청년의 기세로 흐르고, 맛난 식사를 한 우리는 용수철 같은 탄력을 받아 지리산 산행을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다는 산속 주막집은 시간 반은 오르고야 계곡물 소리만 요란한 곳에 묻혀 있었다.
도토리묵과 정상에 오르도록 마르지 않는 계곡물로 빚은 막걸리 맛이 일품이라며 무조건 주류를 사양하는 나에게 S씨는 지리산이 아니면 맛 볼 수 없는 30년 전통 밀주라며 한사코 들이민다
설마 밀주일까? 밀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반세기 전의 기억이 총알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었을 때 엄마는 밀주 장사를 하셨다. 어느 날 밀주 단속반이 우리 집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마침 멀리 출타 중이어서 내가 그분들을 따라 다니며 누룩을 보관했던 방문을 열어주었다. 가슴 두근거리던 소리는 단속반 아저씨한테 들리는 듯 했고, 방안의 물건들은 만지기만 해도 누룩 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는 터라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는 위기였다 아저씨는 손에 든 유자 향 때문에 누룩 냄새를 놓친 것인지 아니면 더 정확한 증빙을 찾기 위함인지 방을 나와 마당에 있는 장독대로 향했다. 가장 큰 항아리 뚜껑을 막 열려는데 밖에서 일행 중 누군가 “어이! 가세! 내일 와야 할 것 같네 ” 하자 열던 뚜껑을 다시 닫고 들고 다니던 유자 향을 맡아가며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우리 집을 나갔다. 그분이 가신 뒤 뚜껑을 잘 닫으려는데 헌 옷으로 덮어놓은 항아리 안에는 누룩이 가득 들어 있지 않았던가?
아저씨가 되돌아와서 내 목덜미를 확 잡을 것 같은 무서움과 이미 방안에서 확인된 물증들로 들켜버렸다는 체념에서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밀주를 만들어 늦은 밤 식당 뒷문으로 쫒기는 듯 드나들며 밀주를 대시던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과, 여린 어깨에 밀주 통을 메고 따라다니는 오빠가 안쓰러워 가슴이 타들어갔던 설움이 겹치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마치 거북 등처럼 두껍고 딱딱한 세월로 겹겹이 흘렀지만, 마치 어제 일인 양 밀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속살처럼 불쑥 떠오른 것이다.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의 얼을 말살하려는 온갖 계책도 모자라 국민들의 피를 말리려는 주세령을 내려 가정에서 술 만드는 것까지 금지했던 만행 이었다 그 잔재를 해방이 되어 20년이 지난 때까지 민속주나 다름없는 막걸리를 왜 그토록 무섭게 단속했을까? 누룩을 들키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집으로 는 로또 당첨 만큼이나 행운 이었다
하지만 단속반 아저씨는 너무나 명백한 현장을 왜 모른 체하고 나갔을까?
우리집을 덮어 주라는 사주라도 받기에는 우리 엄마 처지가 너무 열악했는데 이미 백골이 진토 되신 어머니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의구심은 지금도 내 머리 속에 맴돈다.
그때일이 내 인생에 면역이 되어 주었는지 통제 할 수 없는 수많은 운명의 불확실 앞에서 두려움으로만 여기지 않고 긍정에 체면 을 걸어 용기로 살아온 기반이 되 주었던 것 같다.
막걸리는 그 옛날 술이자 밥 노릇을 했다. 농사일에 주린 배를 채워 주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던 친구이기도 했다 .
우리 형제들은 구수한 맛을 술인지도 망각하고 오며가며 마시다가 잠이 들어 해거름에 일어나 아침인줄 알고 등교 했다가 망신당한 적도 있었다 친구는 아버지 새참거리로 막걸리 심부름 가면서 맛에 유혹되어 다 마셔버려 빈 주전자를 받으셨던 아버지의 허망한 애기며 ,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밥 대신 술을 먹여 울다가 웃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내 어머니 손끝에서 우러난 밀주 맛은 세월 속에 묻혀 추억의 향기로만 떠오를 뿐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다.
고생만하시고 가신 어머니의 인생이 아픈 기억만 남아있는데 진한 밀주 맛 때문일까 그때의 일들이 그리움으로 다가 온다 .
일찍 해가 떨어진 계곡에는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쏴~ 쏴~ 쏴 내 뒤를 따라오며 산천을 울리고 계곡에 숨어있는 산삼이 녹아내려 밀주를 빚으면 주막집에 모여들 등산객들의 문전성시를 기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