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500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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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 욱
아침에 눈을 뜨면 슬레이트 지붕에 촘촘히 난 구멍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빛 무리들이 기름에 찌든 얼굴들에 은총을 드리우고 있다. 냉기가 점령한 방바닥은 솜이불에도 온기를 허락하지 않고 여덟 명이 모여 발바닥을 맞대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난로에는 연탄이 스물두 구멍에서 불춤을 추고 있다. 얼어붙은 뼈마디를 꺾으며 포복하고 기도하는 일은 아침마다 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의식이다.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싶어 눈뜨자마자 식당에 달려갈 수는 없다. 남자 기숙사에 하나밖에 없는 지하수를 끌어 올린 수도는 공장 마당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고 밤새 얼지 말라고 틀어 놓은 물은 넓고 큰 피라미드를 수돗가에 지어 놓았다. 밥 먹기 전에 형들이 씻으려면 막내는 피라미드를 부셔놓아야 했다. 그다음에야 식어 버린 국에 밥을 대충 말아서 식사기도가 하늘에 닿기 전에 먹어야 했다.
“막내, 아직도 먹냐? 이게 군기가 빠져서 빨리 안 먹냐!”
“너 어제 야학 갔다 와서 청소 안 했지? 확 죽고 싶냐! 빨리 청소해 이 새끼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는 말을 모르는 형들이 어제 하던 잔소리를 오늘도 할 때, 오늘은 유독 콩나물 대가리가 씹는 맛이 있다고 느끼면서 대충 씹어 먹었다.
“오늘 저녁에는 우리 회사가 수출 500만 불을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파티할 겁니다. 모두 참석해 주세요.”
아침에는 본 적이 없는 회장님이 조회시간에 오셔서 저녁에 파티를 한단다. 500만불이 얼마나 많은 돈인지 짐작할 수 없는 나는, 파티에 쌓여 있을 고깃덩어리와 떡과 통닭으로 500만불을 생각했다. 오늘은 배가 터지는 날이 분명했다. 저녁에 있을 전투를 위해서 점심부터 거르고 껌을 씹으며 고기 뜯을 준비운동을 했다. 딱딱한 단무지와 콩나물 대가리가 아니라 진짜 고기를 먹는 날이다.
저녁에 있을 파티는 작업도 빨리 끝나게 했고 재봉틀이 치워진 자리에 작업 테이블이 흰 종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화려한 파티를 기름 냄새와 모터 타는 냄새로 절여 있는 곳에서 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빙 둘러앉아 음식이 나올 때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토실토실한 고기 살점에 눈인사를 보냈다.
음식을 다 차려 놓은 것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회장님은 한 번도 공장에서 본 적이 없는 반짝이고 투명한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한신 가족 여러분이 노력해 주셔서 이렇게 수출 500만불이라는 큰 성과를 만들었습니다.
모두 잔을 들고 건배를 하겠습니다.”
“위하여!”
흰 머리에 날이 선 양복을 입고 기숙사 거울보다 깨끗한 차를 타시는 회장님이 가족이란다. 회장님과 공돌이가 가족이 된 기념으로 사이다 잔을 높이 들고 외친다.
“위하여!”
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기에는 빠른 16살이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손은 회장님과 같은 잔을 들고 오늘 같은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위하여를 외치고 있었다.
기름진 음식들이 굳은살을 부드럽게 하고 알코올이 기름때를 씻겨 내면서 500만 불의 축복에 다들 취해 있었다. 분위기에 끌려 마이크를 잡은 회장님은 MY WAY를 꽉 찬 드럼통 굴러가는 목소리로 부르고 짙은 눈썹은 장단을 맞추어 꿈틀거렸다.
“I did it my way(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어)”
회장님 노래에 이어 형들이 만든 록밴드가 노래를 부를 때 창문이 들썩이고 전자기타에서 나는 소리는 귀를 먹게 했다. 형들은 일할 때와 잔소리할 때와는 다르게 송골매 노래를 송골매처럼 불렀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바보 바보 나는 바보 인가 봐.”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른 다음에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막내인 내 차례였다. 중학교 합창부에 있었던 나는 자신 있게 마이크를 잡고 앞에 나섰다. 비틀거리는 시선들은 재롱떠는 막내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린처럼 뽑아든 목을 물먹은 병아리처럼 하늘을 향하고 길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일송정 푸르은 솔은...한줄기 혜란 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나는 핏대를 세우며 선구자를 강림시키고 어쩌다 마주친 바보들이 MY WAY를 따라 합창을 부르며 어울리지 않는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남한산성에 떠오른 달은 별들과 장단을 맞추고 앞마당 지키는 강아지는 까치발 들고 구경하는 손님을 쫓느라 여념이 없다. 술래잡기 힘든 파티가 끝나며 각 잡힌 자가용이 짙은 기름 냄새를 뿜으며 가로등 사이로 사라지고 우리는 어둠이 잡아먹은 골목을 지나 내일을 준비한다.
낮에 찾아주는 온기가 없어 상자가 된 솜이불을 깔고 거들먹거리는 몸짓으로 솜이불 속에 몸을 뉘었다. 스물두 구멍에서 피어난 불꽃은 찬바람 이겨낼 힘이 없어 비틀거리고 슬레이트 지붕에는 별들이 구멍마다 메우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고기 쌈 하나에 500만불은 잊어버렸고 배에서 기름을 짜내어 몸을 덥히는 오늘은 회장님과 가족이 된 날이었다. 은빛 찬란한 잔을 높이 들고 말 달리는 선구자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홑 솜이불을 덮고 봉천동 산 골목에서 붕어빵 굽는 어머니를 꿈에 보았다.
“엄마야, 오늘 고기 묵었다. 고기 묵고 싶제...”
흰 머리에 날이 선 양복을 입고 각 잡힌 자가용을 타는 회장님과 가족이 되었지만, 봉천동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는 붕어빵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는 고기 한 점에 어머니를 잊은 죄책감에 밤새도록 배앓이를 하였다. 그날은 수출 500만불을 이룬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