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타본 기차는 터널을 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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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 욱
흔하지 않은 남녀 공학에 다니던 중학교 시절은 여학생 짝이 쓰는 비누 냄새를 좋아하며 여드름 꽃이 피기 시작한 소년기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서울을 가야 한다면서 짐을 싸라고 하였다. 버스 타는 것도 무서워 안내양 누나 눈치 보던 부산 촌놈이 드디어 서울을 가는 것이다. 같은 반 친구 중에 서울을 가본 친구는 공부 잘하고 집이 부자인 재수 없는 반장뿐이었다. 서울을 다녀오면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무용담을 하는 서울 멋쟁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봐야 멋쟁이가 되는 것이다.
서울 가서 공부할 책도 챙기고, 촌놈 티가 최대한 안 나는 옷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야 이 뭉디야, 짐 넣을 가방도 없는데 뭐 하려고 책은 챙기노.”
어머니 꾸중에 평소 그렇게 쳐다보지 않던 책이 불쌍해졌다. 서울 가서 공부하면 반장 놈처럼 공부를 잘할 수 있을 텐데 진심을 몰라주는 어머니가 섭섭했다. 하지만 걸쭉한 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랴, 서울 물만 먹어도 조금은 똑똑해지겠지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을 뿐이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막차였다. 어머니는 일행이 셋인데 좌석 표를 두 개만 샀다. 혼자 따로 앉아 가는 것보다 조금 좁아도 살을 맞대고 가는 것이 좋기는 하다. 푹신한 녹색 의자에 앉아 사연을 품고 상경하는 제각각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을 때, 기차는 서서히 바퀴를 굴려 촌스런 부산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거리와 건물들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불빛들이 힘겹게 몰아내고 있었고 낮에 본 동무들 얼굴이 창가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차 여행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서 최고는 역시 먹는 것이다. 부산을 출발한 지 1시간, 기다리던 역무원이 먹을거리 가득한 황금 마차를 밀며 우리가 탄 열차 칸 문을 열었다.
“엄마야, 달걀하고 사이다 사도. 먹고 싶다. 형아야 니도 먹고 싶제?”
창밖만 멍하니 쳐다보는 형 옆구리를 쳐대며 말했다.
“이 뭉디 자슥아, 내가 언제 먹고 싶다고 했노, 니나 묵으라.”
먹는 것에는 말을 잘 따르던 공부벌레 형이 짜증을 내도 음식 앞에 양보가 없는 나는 결사 항쟁의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계속 사달라고 졸랐다.
여관방이 된 심야 기차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고 원망스런 눈으로 보던 어머니는 역무원을 세우고 계란 한 묶음과 사이다를 샀다. 먹는 것에는 자식이 부모를 대부분 이기는 법이다. 달걀은 한 묶음에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신나게 콧바람을 불며 어머니에게 한 개, 형에게 한 개를 주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껍질을 벗겨 두 입 만에 달걀 한 개를 먹어 치우고 어머니 손에 얌전히 있는 달걀을 보았다.
뚫어지게 보며 침을 꼴딱 이고 있을 때였다.
“지욱아, 이것도 니 묵으라 엄마는 멀미해서 안 묵을 란다.”
“엄마야, 진짜 멀미하나? 그럼 달걀 내 묵을까?”
거침없이 어머니 손에서 달걀을 뺏어 들어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과 달걀 조금을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삶은 달걀과 사이다는 없을 것이다. 부산 촌놈들은 절대 모르는 맛이다. 세련되고 능숙하게 달걀을 먹어치우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형을 보았다. 형 손에는 아직 벗겨지지 않은 달걀이 세련된 손과 맛있게 먹어 줄 주인을 찾는 것 같았다. 어둠에 먹혀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창밖을 보는 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아, 니도 멀미하나? 왜 안 묵노!”
형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기운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됐다, 내 알아서 할게 조용히 해라.”
“알았다, 니 안 묵으면 내도, 알았제.”
어머니도 형도 말없이 창밖을 보고 서울 나들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 사춘기 형은 생각할 게 많고 어머니는 멀미하느라 힘이 든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서울이 기차 창에 영화처럼 떠오르고 달걀은 사이다와 함께 속 편한 내 속에서 행복이 되었다.
밤을 꼬박 달리는 기차는 도시를 떠나 더욱 진한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시간이 개념을 잃어버려 서울 멋쟁이를 만나는 설렘도 지치게 되었다. 세 모자는 2인용 의자에 몸을 의지하고 설익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였을까?’
15살짜리 꼬마가 재봉틀을 돌리고 공장 식당 창문을 도둑고양이처럼 수시로 넘나들며 찬밥에 단무지 비벼 먹는 꿈을 꾼다. 밤이면 빗속을 뛰어가 교회 지하실 야학에서 공부하는 소년은 부산 촌놈이 아니라 서울 멋쟁이였다.
덜컹거리는 기차 때문에 비몽사몽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뺨에 떨어지는 촉촉한 물기가 어머니 눈물처럼 짜다고 느낄 시간에 우리를 태운 야반도주 기차는 밤을 달리고, 누구도 반겨주지 않을 서울행 기차는 가장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