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게장
SDU 문예창작학과 2015760157 김오심
사랑은 기다려야 오고, 그리움은 멀리 있어야 더 짙어지나. 세계가 안방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시대라 캐나다에 사는 막내와 화상통화는 일상이 됐다. 9남매 중 막내가 3살 되었을 때 부모님은 우리를 데리고 고향 해남에서 목포로 이사했다. 1985년도의 일이다. 지방대학에서 호텔경영과를 졸업한 막내는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 학원을 열심히 다니더니 외국인과 간단한 소통은 수월하게 잘했다.
제부는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요리사로, 동생은 호텔리어로 근무하다 2008년에 결혼했다. 우리 가족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하냐며 다른 일을 권유 했지만, 막내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재밌어 했다.
결혼 후 제부는 캐나다로 한 해 먼저 들어가고 막내는 1년 늦게 들어갔다. 여러해 전에 이민한 제부의 누나가 밴쿠버에서 이미 생활기반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부부의 이민은 그리 불편한 일은 아니었다. 캐나다는 복지행정이 한국보다는 낫고, 자연환경이 한국보다 훨씬 좋은 나라니까. 멀지만 좋은 환경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막내를 그렇게 걱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족 중 한 사람이 외국에 살아서 외국에 대한 낯설음도 없어지고 좋았다.
이민 가서 시민권을 취득하고 가끔 귀국하여 한 달 이상 씩 친정에서 쉬어 갔다. 가족행사가 있을 때도 왔고, 어머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도 왔다. 막내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되는데도 아이가 없어 임신을 계획하고 시술 받기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2개월을 국내에 머물다 캐나다로 출국했다.
임신 시술을 위해 병원에 들렸을 땐 자연 임신이 되어 있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수술 후 한의원에서 한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다. 기간을 2개월만 갖고 왔던 터라 완전히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일정대로 출국했다.
그런데 막내에게 변이 생긴 건 출국 후 캐나다에 도착하고서 2일째부터였다. 출국 전 전라북도 정읍 시댁에서 하루 밤을 자고 가기로 하고 시댁에 이웃 어른들과 ‘간장게장’ 음식을 잘하는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막내는 간장게장을 유난히 좋아했다. 시댁어르신들도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여서 출국시키려고 했던 일이다.
출국 후, 자주 연락하는 일곱째 동생에게서 막내가 아프다고 연락 왔다. 처음에는 감기 정도인 줄 알고 카톡에서 평소처럼 장난치며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야기하는데 다른 동생이 개인 카톡으로 막내의 위급 상황을 알렸다. 폐에 물을 내리는 관을 꼽고 산소 호흡기를 차고 생사를 넘나든다는 말이었다. 친정아버님에게는 막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예 언급도 못하고 형제들끼리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생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엄마를 보낼 때와는 참 많이 달랐다. 세월이 지나면서 할 일이 많아지고 날마다 바쁘게 움직일 때 엄마는 그냥 ‘아플 나이가 되셨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갑자기 등지셔서 그런지 ‘사람 다 죽는 거지’ 하며 스스로 위로 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 막내의 위독함은 참 달랐다. 자꾸 눈물만 나는 것이다. 9남매 모두 일거리를 맡고 있고 어느 자식 하나 한가한 사람이 없는 가족들은 일단 멈추고 캐나다로 갈 형제를 의논했다. 가서 막내의 상황을 봐야 안심이 될 상황이었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막내는 중환자실에서 격리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고 가족 면회도 안 되고 간신히 제부만 감염을 방지하는 옷을 입고 만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가슴조리는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막내의 소식을 들으며, 서울에 있는 일곱째 동생이 캐나다로 출국하기로 결정하고 추진하자, 막내는 좋아지고 있다며 다시 연락 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우리가족은 멀어서 어찌 할 수 없는 불안감에 떨며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내면서 막내의 호전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막내에게 정신 들 때 마다 메시지를 남길 것을 요청했고, 막내는 핸드폰을 들고 있기도 힘들다고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폐에 꽂은 호스가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유발해서 힘들고 아프고, 한국에 있는 가족이 더 보고 싶어서 슬프다고 했다.
함께 먹은 제부와 시댁어른들은 다 괜찮은데 막내만 이상 증세를 보여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간장게장에 있던 충이 막내의 폐로 이동한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두 번의 유산 후 한의원에서 보약을 먹고 있어서였을까. 막내는 간장게장을 먹고 정말 죽을 뻔 했다. 폐가 축소되고 숨쉬기 힘들어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의사의 응급처치와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며 치료가 진행됐다는 말에 마음은 만사를 놓고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동생의 아픔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하면 정말 간담이 써늘하다. 동생은 위독한 순간을 혼자서 버텼고, 원인이 파악되고서도 빨리 호전되지 않아 여러 날을 고생했다. 우리가족은 정말 막내가 멀리 있음을 실감했다. 동생이 아픈데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어 마음은 조급한데 쉬이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막내가 안타깝고 많이 걱정됐다. 성격이 좋고 서글서글해서 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이 많았던 막내 동생이었는데 얼마나 아픈지 정신이 좀 들 때 화상통화는 정말 축 늘어진 낙지 같았다.
막내는 혼자 있는 중환자실에서 한 달 넘게 치료를 받았고 마음만 졸이고 있던 우리들에게 호전상황을 알려 왔기에 망정이지 이대로 동생을 보내버렸다면 정말 너무 억울한 일이 될 뻔 했다. 이럴 때는 동생이 멀리 있다는 게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음식을 먹다가 생을 달리한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복요리를 잘 못 먹어서 가기도 하고, 음식이 변질되어 식중독으로 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세상을 뜨기도 하지만 내 동생이 먹는 음식에서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도 간장게장을 참 좋아하는데 이제 그걸 보면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 참지 못하고 젓가락이 먼저 가버릴지도 모르지만, 음식을 파는 사람들은 정말 신중을 기해야 함을 느낀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지난해 말까지 치료를 끝낸 막내와 화상통화를 한다. 막내가 핼쑥해진 모습으로 또 쿨럭 거린다. “아직도 안 나은 거야?.” 막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기 가득 해맑은 모습을 전해온다. “언니야 나 임신 4개월 됐어.” 힘들어 하면서도 뿌듯해 하는 막내를 보니 행복하다. “간장게장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동생아 이제 좀 건강하게 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