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가 수놓인 원앙금침 한채 싸들고 시집와서 지금까지 많은 복을 받으며 살았다. 어떤것은 자연의 섭리로 어떤것은 신의 선물로 받아 누리며 여기까지 왔다. 신이 인간에게 복을 주실때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주는 복도 있다는데 우리 가족에게는 두앤씨와 리자 부인이 그런 사람이다. 이들은 한국 아기 두명을 입양한 미국인 양부모이다. 두앤씨가 둘째 아이를 데리러 왔을때 그곳에서 일했던 남편에게 대전가는 길을 물었다고 한다. 남편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고 며칠뒤 잘 다녀왔다고 인사하는 그 사람과 대화가 길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했다며 집으로 같이 와서 하룻밤을 재워보낸 일이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데리고 온 외국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할지 난감했다. 내 입장을 생각 못하는 남편이 야속하고 말도 안통하는 서양 남자가 정말 쑥스러웠지만 성의껏 식사를 대접하고 안방도 내주었다. 이튿날 그 사람이 갈때 설마 또 올까 싶어서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두앤씨는 남편이 통역한 그 인사말을 진심으로 알아들었던지 서울에 올때마다 우리집으로 와서 묵었다. 1년 혹은 2년에 한번씩 왔는데 나는 점점 구면이 되어가니 부끄러움이 좀 덜하기도 했고 손님에게 후한 한국인심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식사는 한식으로 준비했는데 원하면 미국식으로도 먹을 수 있게 빵과 잼등을 사다놓고 집 열쇠를 내주었다. 자유로이 드나들며 서울구경하라고. 남편은 마을버스 타는 법과 지하철 연계되는 정류장등을 알려주고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적어줘서 내보냈다. 남편이 함께 나갈때도 있었지만 그는 혼자서도 잘 돌아다녔다.
어느핸가 그들 부부가 자기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한국음식을 배우러 온 적이 있었다. 나는 말을 못해 어찌할까 고민했는데 길이 있었다. 외교관 남편따라 외국에서 살다온 이웃과 음식솜씨 좋은 이웃을 함께 초청해서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김치, 잡채, 만두, 김밥을 함께 만들어 보게하고 레시피를 받아쓰게했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열심히 실습한 김치 한통을 단단히 포장해서 들려 보냈다. 김치가 시거든 김치찌개로 끓이면 된다고 설명해줬다.
그때가 바쁜 추수절이었는데 남편이 그들을 데리고 처가로 놀러 간다며 휴가를 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시골 농가로. 일손도 돕지 못하면서 외국손님과 놀러간다는 남편땜에 나는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시골집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수선한 집안, 재래식 변소, 파리, 모기... 그런 집에서 어떻게 미국 부인을 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체면으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일을 남편은 했다. 나는 휴가도 못내고 교회지키고 앉아서 죄송한 마음으로 친정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미안해요 바쁜데 손님 보내서... 그 사람들은 한국음식 잘 못먹으니까 밥하는데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나 엄마는 된장, 고추장, 각종 발효식으로 정성껏 차렸는데 하나도 안먹더라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 다음날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기계로 하는 사람을 불러 탈곡한 벼 포대를 논 가운데 그대로 두고 노인 둘이 힘에 부쳐서 농로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사위가 미국사람까지 데리고 와서 다 날라줬다고 좋아하셨다. "우리는 무거워서 못든것을 그 사람은 베개 집어던지듯 하더라." 나는 얼마나 했으랴 싶어서 물어봤다. "몇 포대나 되는데요?" "104포대."
남편은 우리나라 시골 농가를 보여줄 생각으로 갔다는데 마침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늙은 부모님을 도울수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 농촌 체험 제대로 시키고 오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스럽던 마음이 하늘이 닿았나 싶고, 어제의 수치심이 다 사라질 정도로 고마웠다. 남편도, 두앤씨 부부도.
그런 인연으로 남편은 미국 출장길에 그이네 집을 들러서 만나고왔다. 우리 애들이 대학생이 되자 여름방학에 보내라고 연락이 와서 딸들도 방학 두달동안을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지내다 올 수 있었다. 그러다 2003년에는 나까지 초대한 것이다. 자신들이 캠핑카를 샀는데 캐나다를 여행 할 계획이라며 함께 가자고 했다. "미세스 조가 원하면 남편을 동반해도 좋다. 그러나 조는 꼭 와야된다." 영어 못하는 나를 배려해준 초청인데 내가 할 일은 그 자녀들에게 한국말로 대화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미국으로, 캐나다로 큰돈 없이도 3주간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공항으로 마중나온 그의 아이들 린지와 브릴런은 여덟살, 여섯살이 되었고 태권도복과 한복을 입고 나와 반겨주었다. 나는 딸들이 찍어온 이 아이들 사진을 수년동안 냉장고 문에 붙여놓고 보았었다. 아이들은 기분이 들떠서 자기들 방을 보여주고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나는 눈치로 대충 알아들었다. 리자 부인에게 우리 딸들이 와서 오래 묵어갔음을 감사하고 묵었던 방도 보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안방 침대를 내주었다.
두앤씨 가족과 함께 밴프, 쟈스퍼등 캐나다를 여행할때 로키 산맥을 가까이에서 보며 젊은날 존덴버가 부른 '로키 마운틴 하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로키산은 정말 높았다! 우리가 있던 캠핑장에서 가까이 보우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을 보러 걸어내려가면서 나는 탄성을 질렀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본것 같다고. 영화속의 그강은 미국 몬태나 주에 있다는데 나는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강물속에 서있었다. 콜롬비아 빙하를 걸어보았고 빙하수를 먹어보았다. 루이스 호수, 미네왕카 호수등을 따라 걸으며 아는 단어 몇마디만 가지고도 리자와 나는 충분히 행복했었다. 나는 한인 마트에서 사가지고 간 재료로 불고기, 잡채, 두부부침, 라면등을 만들어 한국식사 분위기를 내주었다. 차를 대놓고 설치하기만 하면 두개의 방과 부얶이 되는 캠핑카에서 얼마든지 조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맛있게 먹어줬다. 두앤씨가 우리집에서 묵을때 우리 식구들에게 스파게티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이처럼 부엌을 뒤집어 놓지 않고도 잘 만들어줄 수 있었다.
한치앞을 모르는게 인생이라더니 서울로 돌아와서 나는 암 선고를 받았다. 비호지킨 림프종이다. 내 소식을 들은 두앤씨는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알리고 한국친구를 위해 기도 요청을 했다면서 치료할 동안 입으라고 부드러운 샐내복과 푹신한 슬리퍼를 보내줬다. 아이들과 리자부인이 쓴 손편지도 보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내 치료를 위해서 5년간은 한국방문을 안하겠다고 하더니 5년이 지난후에야 그 가족은 한국을 다시 찾아왔다. 아이들은 11살, 13살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설악산, 경주등을 여행하고 아이들의 출생지인 춘천, 대구의 기관에 들러 생모의 소식을 알아보았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커서 친엄마를 애타게 찾을걸 생각하면 뭔가 단서하나쯤 남겨뒀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그 보낸 당사자의 마음이야 짐작인들 할 수 있으랴. 그 사정을 모르면서 무슨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걸 보고 아이들이 아니라 두앤씨 부부가 눈시울을 붉히는걸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들은 5년뒤에 다시 오겠다 하고 갔는데 약속한대로 2013년에 부녀가 다시 서울에 왔다. 딸 린지가 대학생이 되어왔다. 우리는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거기서부터 서울로 올라오며 린지의 모국여행을 하고 서울에서 다시 제주로 날아가 제주도를 여행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불편없이 지낼 수 있게 배려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언제라도 서울에 오면 내 집처럼 머물다 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꿈도 꿀수 없었던곳, 시애틀의 멋진 해변과 그 해변가에 있는 두앤씨의 이모댁에서 1박2일 하던때, 또 그의 늙으신 부모님이 직접 만들어 대접해준 저녁식사를 생각하면 나는 어느때고 두앤가족의 방문을 환영할 것이다.
그 옛날 남편은 두앤씨를 우리집에 데리고 와야 될 필요는 없었다. 낯선 외국인 접대하게 하고 안방 내주게해서 마누라 눈치봐야 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대화 나누고 끝났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20년 세월을 뒤돌아보니 그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친절이었고 재워 보내야 될 이유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런 인연으로 교류하며 서로 받은 복을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만나게하심의 복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