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듣는 라디오에서 사모아섬 이야기를 들었다.
사모아섬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와 정반대쪽에 있었기 때문에 날자 변경선이 그어졌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날짜에 의해서 사모아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 해가 지는 나라가 되었다. 사모아는 그동안 날짜변경선 동쪽의 시간대를 사용했었지만, 2011년 연말부터 서쪽 시간대로 변경해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사모아는 해가 제일 늦게 지는 나라에서 해가 제일 빨리 뜨는 나라로 바뀌어졌다.
저녁 6시에 방송하는 라디오의 DJ는 사모아섬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루 종일 시달린 고달픈 우리 마음을 이렇게 달래주었다.
“저녁 6시는 감정변경선이라고 이름 짓고 싶네요. 하루 종일 내게 엄격하게 들이댔던 잣대를 느슨하게 내려놓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달쯤 지난 이야기인 데도 가끔씩 ‘감정변경선’이라는 단어가 나를 위로해주곤 하는데, 여행을 떠나는 일이 내게는 감정변경선이 되는 것 같다. 비싼 커피값을 내더라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우울함이 깊을 때, 혹은 허구한 날 궁상만 떠는 내가 갑자기 가엾다고 느껴질 때 떠날 수 있는 곳,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양평으로 떠났다.
같은 직장에서 동료로 근무하거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하고 모임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꽤나 많은 DNA가 서로 일치하거나 느낌이 맞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그렇게 모여진 네 명이 하룻밤 여행을 떠났다. 재주가 많은 그녀들과 하는 여행은 참으로 즐겁고 유익했다. 그 중 한 명이 양평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문가 수준의 천연염색을 하는 A는 인견과 광목을 한필씩 준비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쪽물과 감물로 염색을 한단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옆에서 옷감을 주물럭거려서 적절히 물이 들었다고 그만 짜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둘이서 양쪽 끝을 잡고 꾹 짜주는 일만 하면 된다.
천연염색이라 그런지 네 등분으로 나눈 옷감은 모두 색이 달랐다. 그래서 천연이라고 하는가보다. 하늘보다 더 파란 쪽빛에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내뿜었다. 감물에 매염제를 조금 많이 넣었다는데, 감물색이 아닌 연보라 빛이다. 감물빛이 나오려면 아홉 번 담갔다 햇빛에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니, 감물색은 정성과 인내심이 합쳐진 색임이 분명하다.
하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연한 보랏빛 감물색이다!
민요를 하는 B는 마당의 잡초를 뽑느라 여념이 없다. 공짜로 다른 이의 별장에 머무르니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한단다.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부서진 나무계단에 돌을 괴어 흔들거리지 않게 수리도 한다. 잠시 숨을 돌리며 과일과 빵으로 새참을 먹는데, 옆집 부부가 궁금한지 신기해하며 묻는다. 별장주인인 C가 쪽물들인 손수건 넉 장을 냉큼 건네니 부부의 얼굴이 환해진다. 도시생활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넉넉함이다. 그건 인심이 야박해서라기보다 옆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자체가 자연에는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한다. 하긴 그렇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내 몸을 씻고, 말리고, 먹고, 입히기 위해 소모한 것들을 꼽아보면 ‘헐 ~ ’하는 탄식이 나온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자연에 얼마만큼의 손상을 입히게 되는지를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흙에게, 공기에게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
밤이 되니 주위가 까맣다. 마당에 둘러 앉아 삼겹살을 안주삼아 네 명의 여자들이 신나게 떠들고 놀았다. 내일 아침 서두를 필요 없이 천천히 움직이면 된다. 산책도 하고, 담 너머로 이웃집 구경도 하고. 그리고 두물머리로 떠나면 된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 그래서 두물머리다. 예전에는 양수리라고 하던 시절, 나는 20대였다. 청량리역에서 비둘기호를 타고 우리들은 떠났다. 밤새 먹을 양식과 알콜이 잔뜩 담긴 배낭을 메고, 일행 중 두 명쯤은 통기타를 둘러멨다. 도착해서 급하게 준비한, 세상에서 제일 맛난 밥과 고추장찌개로 배고픔을 채우고 나면, 밤늦게까지 세미나를 했다. 노동자들의 아픔을 이야기 하고,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불공편한 사회를 비판했다. 요즘 대통령을 풍자하는 시대에 비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야기다.
예전의 두물머리는 강원도 산골에서 물길을 따라 온 뗏목과 나무들이 서울로 들어가기 전 하루 머물러 가는 쉼터였다고 한다. 당연히 길가는 사람을 위한 쉬어 갈 곳이 필요했을 테고, 주막집이 들어서게 되었겠지.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이 만들어지고 꽤나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초 팔당댐이 생기면서 그곳 사람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나룻배는 사라지게 되었다. 더구나 이곳 강가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배가 다니지 않게 됐다. 뱃길은 자동차가 대신했다. 지금은 땅위에 돛단배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스라이 물안개가 낀 저 강을 건너가고 싶었다. 그러면 어깨를 긴장하지 않아도, 눈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될 그런 편안함이 있는 ‘어떤 곳’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배를 저을 뱃사공은 이미 50년 전에 사라져버렸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배를 통해서 일을 하고 배를 통해 돈을 벌어서 생활했다고 하는데, 도시의 발달과 함께 일자리를 잃어버린 그들의 마음을 되짚어 본다.
봄비를 친구삼아 수종사에 오르니 멀리 두 강이 만나는 풍경이 보인다. 편안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에게는 최고의 출사지로 꼽히고, 드라마 명장면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가보다. 더구나 오늘은 봄비에 따라온 물안개가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준다. 사방 아무 곳이나 스마트폰으로 눌러대도 모두 작품이 된다. 서로의 사진을 비교하며 네 명의 아줌마들이 깔깔거린다. 예술적 감각이 있는 별장주인 C는 얼굴의 주름과 잡티까지 없애주는 ‘뽀샵’의 명수이기도 하다. 맛난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셨지만 아직 이른 오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광주 천진암에 들르기로 했다.
이곳엔 꽤 여러 번 왔었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던 적도 있었고, 노랗고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에 감탄을 하며 오른 적도 있었다. 꽤나 긴 거리를 차를 타고 가면서 항상 생각했던 것이 있다.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등에 식량과 책을 지고 걸어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천진암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벽(李檗)이 자생적으로 천주교 조직을 키워나간 곳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하니, 우리 한국인들의 ‘진한 독특성’이 놀라울 뿐이다. 기록에는 이벽의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 서학과 천주학 서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단다.
여하튼 이곳에서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과 함께 15년간 천주학을 공부하였다. 이벽은 1784년 이승훈(정약용의 처남)을 중국 북경으로 보내 한국인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고, 이후 이곳에서 권일신, 정약용에게 조선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1785년 신자들의 집회도중 형조에 적발되어 모두 압송되었다. 당시 32세였던 이벽은 아버지 이부만에 의해 가택연금 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천진암터와 창립성현 5위 묘역을 올라가는 길에 뽀롱거리는 새소리가 정겹다. 넉넉한 봄비 덕에 계곡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에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이 건립중이다. 10여 년 전 풍경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느린 건축’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