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에게해 크레타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라고 한다. 그는 평생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럽, 북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을 여행했다.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방황이자 구원이었을까?
모두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TV화면은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사람마음은 하루에 7만 번을 반응한다고 하는데,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한 마음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마음을 힘들게 한다. 꿈속까지 따라와 나를 옭아맨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와 눈조차 맞추지 않는 동료에게 반응하지 않고, 의견이 엇갈린 상대방을 설득하지 않기.’를 다시금 마음먹어 본다. 어차피 곧 스쳐지나갈 일에 내 삶이 휘둘리지 않으면 될 일이다. 가장 큰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라는 말이 생각난다. 요즘 자주 외롭다는 느낌이다. 이제 자유로울 준비가 된 것일까?
부천에서 완도까지는 참 멀다. 땅끝마을이라는 해남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더 가야한다. 이른 아침 서둘러 출발하느라 피곤해진 몸을 쉬기 위해 잠시 눈을 감는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니 손도 편하고 눈도 자유롭다. 부천과 완도의 중간쯤인 공주 정안휴게소에서 한번 쉬고 버스는 빠르게 달린다. 누군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일까 본래 쉬는 곳인가 싶을 만큼 작은 휴게소에 버스가 섰다. 도시의 편의점만한 영광휴게소가 아담하고 예쁘다. 시골도 도시처럼 햇볕이 따갑긴 매한가지다.
오후 3시가 훨씬 넘어 완도터미널에 도착하니 C의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초면인데도 스스럼없이 친구의 친구들까지 편안하게 맞이하는 그녀는 우리에게 추어탕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제대로 점심을 먹지 못한 우리들은 당연 오케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뼈째 넣고 믹서기에 갈아서 끓인 ‘간추어탕’과 체에 살만 걸러서 끓인 ‘내린추어탕’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 도시에서는 손으로 직접 체에 내린 추어탕을 먹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자랑을 곁들여서. 사실 우리 셋은 제대로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설명과 함께 먹은 추어탕은 정말 맛이 좋았다. 더구나 여기는 전라도 아닌가, 맛있는 게 당연하지.
“아이고, 뭐하려고 돈 들이고 방을 얻어, 우리방 하나 내줄테니 걱정 말아요.”
그러면서 우리를 집으로 데리고 간 그녀는 우리들에게 안방을 내주었고 저녁식사 전에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라며 차키까지 내준다.
‘우리 요렇게 뻔뻔해도 되나?!’
그녀에게 느껴지는 편안함은 이번 여행이 무척 행복할 것 같다는 예감과 연결된다.
완도타워에 오르니 사방이 바다다. 넓은 바다엔 완도의 특산품인 전복양식장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엔 서민들은 구경조차하기 어렵던 전복이었지만, 지금은 양식 덕분에 전복죽뿐만 아니라 전복삼계탕, 전복회까지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으니, 자연산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이른 저녁, 청해진 유적지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어망을 손질하는 어른들만 두세 명 보일 뿐 주위가 고요하다. 더구나 관광객은 우리 세 명뿐이다. 맘껏 히히거리며 다녀도 눈총 받을 일 없으니 더 좋다. 성벽을 따라 걷는데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왔다고 하더니 땅속 지렁이가 시멘트 길 위에 많이 보인다. 이 따가운 햇볕에 어쩌려고 기어 나왔나싶다. 이미 말라버려 죽은 것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움직이는 것들은 나뭇가지로 밀어서 풀숲에 보내주었다. J는 징그럽다며 저쪽으로 도망을 간다. 걷다보니 꽤나 큰 뱀이 발밑을 지나간다. 이번엔 나도 화들짝 놀라 도망하는 수밖에. 지렁이까지는 극복했는데 뱀은 너무 징그럽다. 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
푸르른 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은 참으로 좋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고 쉬고를 반복하다보니 6시가 넘어버렸다. 아뿔싸, 장보고 기념관이 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서둘러 가보니 역시 문을 닫았다. 기념관을 미리보고 청해진에 갔어야 했는데, 미련이 앞섰구나!
친구 남편은 완도가 고향이란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바다가 좋고 고향사람이 그리웠다. 아직까지 영화관도 없는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살 수 있어서 너무 좋단다. 부러움이 뭉게뭉게 올라온다. 나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고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8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공장 담벼락이 아이들 놀이터였다.
조금은 늦은 저녁, 바닷가 근처의 단골식당에서 받은 상차림에 우리들은 탄성을 질렀다. 단아한 차림의 색색별 해산물 요리는 모양만큼 신선하고 맛있다. 부지런히 젓갈질을 하는데 요즘 도미가 제일 맛있는 철이라며 주메뉴로 도미회가 올라온다. 감탄을 더하며 과식도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쉼의 여행에 ‘맛난 음식’은 행복을 더해준다.
이른 아침 보길도를 향해 출발했다. 아직은 이른 휴가철이어서인지 배에 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도착했단다. 배에 차를 싣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버스에는 탄 사람은 우리 세 명뿐이다.
윤선도는 해남이 고향이다. 고산은 1637년 2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며 탐라(제주)로 떠난다. 제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처음 배를 댔던 곳이 부황리 북쪽 바닷가포구다. 수려한 봉우리와 골짜기의 풍광에 감탄하다 고산은 격자봉에 올라 지세를 살핀 후 부용동에 은거의 터전인 낙서재를 마련했다.
고산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자연시인으로 문학사에 깊이 남을 주옥같은 <어부사시사>를 창작하였다.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고 노인을 보양하는 의곡(義穀)을 설치하고, 농토가 부족한 섬의 민생고 해결을 위해 사재를 투입하여 노화읍 구석리와 석종리에 130정보(1정보 3천평), 진도에 200정보의 간척지를 농토로 개척하여 마을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개척사업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고산은 버리고 나서 진정으로 행복해졌음이 분명하다.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3년 전에 지어진 윤선도문학관 벽면에 새겨진 글이다. 문학관에는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제대로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음악과 함께 어부사시사 40수 전체를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그 유명한 청산도는 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완도에 다시 와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저녁을 먹으며 ‘달방’얻어 완도여행을 해야겠다고 하니, 친구남편이 달방보다는 하루에 한 개씩 섬을 여행하며 그 섬에 머무는 것이 나을 것이란다. 완도에는 265개의 섬이 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