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닭
돌다리를 건너 시리봉산 밑에 자리한 윤장이 아버지 양계장에서 암탉 세마리와 수탁 한마리를 사 와 아버지가 지어준 우리 집 암탉들의 이름은 멋없게도 1호닭 2호닭 3호닭이었고, 수탉은 이름도 없이 장닭이라 칭했다.
1호닭은 토종암탉 치고는 몸집과 벼슬이 크고 움직임은 느릿느릿했으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어 다소 미련하게 보였지만 털빛은 붉고 강렬했다. 2호닭은 흰색과 검은색털이 두루 섞여 어디에 있어도 눈에 잘 띄었고 당당한 체구에도 조심성이 많아 사람을 가장 멀찌감치 피해 쌀쌀맞게 느껴졌다. 그리고 3호닭은 작은 체구에 재바르고 또릿또릿한 영락없는 토종닭의 모습으로 그중 제일 당차고 활기찬 느낌이었으며 사람이 다가가면 피하지 않고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버릇이 있는 놈이었다.
닭들을 집으로 데려오기전 아버지와 내가 뒷마당에 둘러쳐져 있던 판자 울타리를 뜯어내고 각목으로 형태를 잡은 뒤 철사로 촘촘히 엮어 막은 닭장엔 바닥에 모래를 두껍게 깔았고, 알둥지와 횃대도 적당한 높이에 매달아 두었었다.
몇 달이 지나 봄이 되자 암탉들은 제각각 스무댓개씩 알을 품어 병아리가 깨어나니 닭의 수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그해 가을부터는 동네 사람들이 계란과 닭을 사러 우리 집에 들르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닭을 키우기 시작하고 두 해가 지난 이른 봄. 동네엔 닭병이 돌아 닭을 키우는 집집마다 닭들이 죽는다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집 닭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닭장에 들어가 보면 전날 멀쩡해 보였던 닭들도 죽어 뻣뻣해진채 여기저기 쳐박혀 있었고, 그 나머지 닭들도 며칠 지나지 않아 대부분 죽었다. 우리집 닭들의 원조인 1호닭 2호닭도 그 사이 다른 닭들과 마찬가지로 죽어버렸지만, 유독 3호닭만은 병이 들어서도 죽지는 않았다.
들판에는 파릇한 풀들이 돋아 바람에 산들거릴 정도여서 그곳에 메뚜기 같은 풀벌레가 눈에 띌리 만무했지만 나는 풀숲을 뒤지고 뒤져 날개도 생기지 않은 어린 메뚜기라도 찾으면 그 즉시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한없이 흔들어대는 3호닭을 가슴에 품어 안아 강제로 부리를 벌리곤, 스스로는 무엇도 삼키지 못하는 그 놈 목구멍속으로 잡아온 메뚜기를 깊숙히 밀어 넣었다.
평소의 당찬 이미지와 같이 3호닭은 병이 들고 며칠이 지나서도 죽지 않았고, 애당초 아버지가 내게 관리 책임을 맡겼던 닭이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선 3호닭이 살아 있나 확인하곤 바로 풀밭으로 내달는게 일처럼 되었다.
그렇게 메뚜기를 잡으러 가던 내 시야에 마침 냇가에서 천렵하는 동네 형들이 보였고, 찾기도 힘든 메뚜기 대신 물고기를 3호닭에게 먹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렵은 족대, 지렛대, 주전자 담당 외에도 물고기를 모는 역할이 있어 여러명이 같이 할 수 있었고, 천렵이 끝나면 잡은 물고기는 일행이 똑같이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기에 나는 그 무리에 끼어 들었다.
동네에서 시작된 천렵은 상류로 오르며 계속 되었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포기하고 돌아서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어 밤길을 혼자 돌아가기가 겁났고, 나누어 가져야 할 물고기를 포기하고 돌아 가는건 더욱 못할 노릇이었다. 주변이 어두워져서야 잡은 물고기를 나누었고, 내 몫으로 받은 물고기는 풀줄기로 아가미를 줄줄이 끼워 서둘러 집으로 향했지만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실걸 알기에 마음은 밤길보다 더욱 어두웠다.
집에 도착한 나는 우선 물고기를 닭장 철망에 풀줄기채 단단히 묶어두고 혼날 각오를 다지며 방으로 들어 갔다. 집에는 거의 매일 늦게 귀가하시는 아버지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이 늦게 돌아온 죄값을 치러야 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는 종아리를 내 놓은채 엎어 놓은 한되짜리 됫박 위에 올라 섰고 아버지는 회초리로 너댓 차례 후려쳤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바였고, 됫박 위에 서서 회초리로 맞는것이 그나마 덜 모욕적이란 생각에 참을만했을뿐더러, 밖에 3호닭에게 먹일 물고기가 있다는 뿌듯함과 빨리 먹여야한다는 생각이 겹쳐 종아리는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매타작이 끝나자 나는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만 말하곤 바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야밤에 또 어딜 나가?"라는 어머니의 불호령에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닭장으로 튀어 나갔고, 그렇게 닭장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물고기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닭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날 매를 맞고도 멀쩡했던 나는 절망감과 억울함에 그만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 소리에 달려온 아버지에게 결국 자초지종을 말했고, 간밤에 쥐들이 기어 올라 묶어 놓았던 그 물고기들을 전부 물고 갔을꺼라는걸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학교에 가서도 쥐에 대한 미움과 물고기에 대한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고, 3호닭에게 빨리 뭔가 먹여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학교에서의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당시 아버지는 일찍 귀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대게는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서야 거나한채 도시락통을 덜그럭거리며 들어 오셨었는데 그날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풀밭을 헤매다 메뚜기 몇마리를 잡아온 훤한 초저녁이었음에도 아버지는 한 손에 족대, 또 한 손엔 지렛대와 주전자를 들고 닭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물고기 잡으러 가자" 아버지는 다정함을 담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도 상세히 듣지 않고 어제 나를 때린 일이 마음에 걸려 계시다는것을 그 즉시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괜찮다는 의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두가 죽을꺼라고 말하던 3호닭은 나의 그런 정성 때문인지 오래지 않아 기적처럼 완쾌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또 다시 스무댓마리의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