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선물
신문주
갑자기 잔잔한 수면을 뚫고 은빛 잉어 한 마리가 공중으로 힘차게 솟구치다 물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겨울철에 한강변을 따라 죽 걷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광경이다. 크기가 다양한 잉어들이 여기저기서 널을 뛴다. 발길을 멈추고 한 마리의 묘기를 응시하고 있으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마리가 껑충 뛰어오른다. 이는 마치 슈베르트 피아노 오중주 〈송어〉4악장의 경쾌한 음악에 맞춰 물고기들이 꼬리로 트램펄린(trampolin)을 치고 튕겨 오르는 것 같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물고기좌인 나는 이들과 함께 뛰노는 마음이 된다.
그런데 잉어들은 왜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일까? 강태공들은 강가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고 기러기들은 물 위에 바짝 붙어 정찰비행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하게 폴짝폴짝 뛰어오른다. 이들이 뛰어오르는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가 부족해서, 강 표면에 떠도는 벌레를 잡기 위해서, 몸에 붙은 기생충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또는 보트나 수상 스키가 지나간 후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편 미국의 낚시 전문가인 데니스 돕슨(Dennis Dobson)은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는 진짜 이유는 그 동작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물고기의 마음은 오직 창조주께서만 아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물고기들이 펼치는 공연을 보면서 신비한 자연 세계를 잠시 엿보게 된다.
어느 해 겨울은 한강 수면에서 새들이 숨바꼭질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였다. 잉어들이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모습에 못지않게 논병아리들이 잠수하는 모양도 진풍경이다. 요즘과 달리 아직 조류독감(AI)의 위험이 없던 때라 아무 선입견 없이 이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텃새이면서 겨울철새인 논병아리는 겨울에는 머리 꼭대기와 등은 짙은 잿빛인데 몸의 아래쪽은 엷은 갈색이나 흰색이고 목옆은 흐린 갈색이 많다. 병아리를 닮아 몸이 작고 둥글며 날개와 꼬리가 짧다. 논병아리들은 물 위를 떼 지어 떠돌다가 우리가 수영장에 입수할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몸을 수축시켜 동그랗게 만든 후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물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언제쯤 물 밖으로 나오나 지켜보고 서 있는데, 손가락으로 열을 세어도 나오지 않는다. 어디서 나오는지 살피고 있으면 엉뚱한 곳에서 수면을 헤치고 불쑥 나타난다. 내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살다가 이들을 만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철창 바깥에 나보다 더 큰 존재와 더 넓고 크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때 마음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메아리쳐 들려온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이 많은 새들을 살리시는 창조주께서 나도 보살펴 주심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에 가득했던 어둠 속에 동이 터 온다.
그런데 인간이 새보다 더 귀하다는 말이 곧 인간이 모든 창조물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생태주의 비평가인 로렌스 뷰얼(Lawrence Buell)은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는 바로 이 성서 구절이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드러낸다며 비판한다. 현대 생태주의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은 지구 온난화와 같은 해로운 기후 변화가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한다고 보고 이를 대체하는 이념으로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를 주창한다. 생태중심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다른 생물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인간이 새보다 더 귀하다는 사상은 생태중심주의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퀘이커교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는 “모든 성경은 성경을 썼던 정신(spirit)과 동일한 정신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고, 미국의 사상가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이러한 폭스의 주장이 비평의 원칙이라고 했다. 즉 성경 구절은 쓰여 졌던 원래 뜻에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며 걱정에 시달리는 불쌍한 군중들에게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시니 걱정하지 마라.”라고 일깨우시는 전체 문맥 속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 구절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라는 선언이 아니라 “저렇게 작은 피조물도 잘 보살펴 주시는데,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너희 인간들을 얼마나 더 잘 보살펴 주시겠느냐?”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격려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다.
십여 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자연이 전해 주는 격려와 위로를 많이 받았다. 늦깎이 유학생으로서 평소 대학원 수업과 과제 준비로 여유 없이 살다가 가끔씩 자연을 찾아 내 세계 밖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곤 했다. 그 당시 학교와 집에서 미시건 호수(Lake Michigan)까지 약 1.6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호숫가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지만, 또 어떤 때에는 호수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 물을 바라보곤 했다. 논문 쓰느라 심신이 지쳤을 때,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웠을 때, 태평양 같이 광활하게 확 트인 호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와 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무척 작게 느껴졌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훨씬 넘어서는 미지의 세계가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그 미지의 세계는 《월든(Walden)》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야생이 세상을 보존 한다(…in Wildness is the preservation of the World)."라고 설파했을 때의 그 “야생”과 다를 바 없다. 야생에는 사람이 손대지 않은 자연은 물론, 경쟁 사회의 요구와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함도 포함된다. 자신의 한계와 늘 직면하고 사는 유학생으로서 자존감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미시건 호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야생의 힘을 일깨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귀국 후에는 한강변을 걸으면서 자연 속에 드러난 창조주의 손길을 응시하며 야생의 에너지를 받곤 한다. 어렸을 때 광안리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놀았던 기억 때문인지 물은 내게 고향과 같다. 구상 시인이 읊었듯이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한강은 미시건 호수와 전 세계의 강과 바다로 내 마음을 실어간다. 지난 달 내 두 번째 생일에 절두산 성지 밑 산책로에서 출발해서 당산철교, 양화대교와 망원 생태 공원을 거쳐 성산대교까지 한강변 도보 여행을 했다. 지난 십 년간 서강대교 부근 산책로에서 시작해서 절두산 성지나 마포대교까지만 가 보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땅을 밟고 왔다. 성공하기 위해서 숨 가쁜 “피로 사회”에서 자연이 전해 주는 야생의 힘을 가득히 받을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한강이다. 보다 더 많은 이들이 한강의 선물을 누리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