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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동    
글쓴이 : 윤광일    20-01-30 15:27    조회 : 4,428

대전시 중구 은행동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사셨던 동네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은행동 근처에서 살던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을 종종 들렸다. 슬레이트 지붕의 방두칸 짜리 우리집보다 외갓집은 넓고도 풍요로 왔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카스텔라라는 유혹적인 미끼를 나에게 종종 던져주셨고 나는 덥석덥석 잘도 물었다. 그런데 외갓집에 가면 살짝 고민되는 놀이가 있었다. 집 앞에 나 있는 그 넓은 찻길이 놀이의 주무대였다. 그 찻길 가에서 머뭇 거리며 좌우를 살피다가 차가 오지 않는 틈을 봐서 냅다 뛰어 길을 건너면 알 수 없는 희열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나를 살펴보는 눈을 조심해야 했다. 조그만 녀석이 겁도 없이 찻길을 휙휙 건넌다는 꾸중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렇기에 외갓집 대문 앞, 찻길 바로 옆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는 어른의 눈길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가림막이었다.

결혼 후 분가를 한 첫 집은 외갓집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외할아버지께서는 외갓집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4층 빌딩을 세우셨다. 그리고는 새로 지은 빌딩 한켠을 빌려주셨고 내 처는 그곳에서 음식점을 했다그러나 장사는 어려움을 마닥뜨려야 했다. 그 넓게 보이던 찻길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좁아져, 길가에 차를 세우면 한쪽 방향 차선을 온통 차지했다. 조그만 어린아이를 가려주던 플라타너스 나무는 나와 같이 위로 옆으로 자라나 성인 한명을 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도보를 좁게 만들었고 봄에는 꽃가루도 제법 날려 비염의 원흉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게다가 은행동을 중심으로 한 대전 구도심 상권이 둔산 신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날이 갈수록 적어졌고, 은행동은 저물어 가는 해처럼 쓸쓸해져 갔다. 나는 식구들과 대전을 벗어나 서울로 이사 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은행동을 찾을 일은 없었다. 한참을 무심하게 보내던 어느 날 은행동이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나는 문화의 거리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 하지 않았다. 정치인이 제 낯을 내고 세금을 펑펑쓰기 위한 핑계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문화의 거리가 되자 사람들이 다시 찾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렸다. 그냥 궁금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 정말 문화가 있는지. 아니면 옛 기억을 되새김질할 만한게 남아 있는지. 오랜만에 찾은 은행동 길은 차가 못 들어 가는 길이 되었고 주차할 장소도 찾기 어려웠다. 평소 준비성이 박약한 자신을 탓하며 은행동 바깥으로 한 바퀴 빙 돌았다. 천변으로 나있는 길 위에는 빨간색 구조물이 양쪽 보도에 발 받침을 하고 서 있었다. 은행동 안쪽은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울긋불긋 했다. 구청장일까. 아님 시장일까. 세금좀 썼네. 딱 이 정도의 느낌이었다.

올부터 한동안은 대전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은행동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시간이 되면 한번 들를까 싶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은행동을 으능정이 문화거리라고 칭하고는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라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이름이 생긴지는 오래되었을 테지만, 꽤나 무심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낯설고 생소했다. '으능정이라니. 내가 소시적에 이 동네서 밥그릇 꽤나 축냈는데 으능정이라는 말을 듣도 못했어.' 라며 누구한테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향에 참으로 무심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전의 자취, 흔적, 추억 이런 낱말거리가 은행동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나온 심리적 방어기작이었다. 은행동보다 더 자주가고 추억거리를 잔뜩 쌓았던 친가는 오래전 소멸된지라 은행동에 대한 집착이 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친가가 있던 동네는 포크레인으로 찍고 불도우저로 밀고해서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고, 그나마 익숙한 길도 몇 배나 넓게 해놓고는 주변에다가 상가를 세웠다. 물장구 치던 개울도막대기 들고 뱀 잡으러 가던 길도겨울에 썰매를 타던 논도 지구라는 행성에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으능정이는 예전 은행동 보다 더 세련되고 밝았다. 음식점들은 서울, 아니 세계 어다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맵시가 있었고, 돌을 단정하게 깍아 만든 블록판을 촘촘히 덮은 도보는 깔끔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1980년대 이전 건물도 언듯언듯 보여 과거 어느때를 소환한 듯 했다. 그런데 공기는 서운했고 낯설었다. 전통이 있는 문화의 거리라는데, 누구의 전통이고 누구의 문화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를 가려주었던 플라타너스 나무는 베어져 공중으로 땅으로 뿔뿔히 분해된지 오래였다.  어릴적 뜀박질을 돌이켜볼 만한 도로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머물던 은행동은 이리 세련된 적도 이리 화려한 적도 없었다.여기는 으능정이일 뿐이다. 그래도 으능정이 나마 되었으니 다행이라 할만 했다. 친가가 있던 동네처럼 소멸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 흔적, 기억은 많이도 지워졌고 지워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서운함에 내 기억속의 부유물을 끌어잡고서는 이것만은 바꾸지 말아달라며 사정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나? 좀만 늦출 수 없을까? 2000년 이나 지난 로마의 콜로세움도 버젖이 서 있는데 말이다. 


노정애   20-01-31 18:54
    
윤광일님
글 잘읽었습니다.

살짝 문장을 다듬어 봅니다.
' 대전시 중구 은행동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사셨던 동네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은행동 근처에서 살던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을 종종 들렸다. 슬레이트 지붕의 방두칸 짜리 우리집보다 외갓집은 넓고도 풍요로 왔다.'
--->
대전시 중구 은행동은 외할아버지께서 사셨던 동네다. 근처에 살던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에 종종 놀러갔다. 그곳은 슬레이트 지붕에 방두칸 짜리 우리집보다 넓고도 풍요로웠다.

'그런데 외갓집에 가면 살짝 고민되는 놀이가 있었다.'
이 문장은 빼시는게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그 느낌들이 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어요.

이렇게 전체 문장을 조금 다듬어 보시면 더 좋은 글이 될것 같아 올려 봅니다.

그리고 이 홈피의 회원 글방에 가시면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읽어보세요. 글 쓰시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윤광일   20-02-01 02:41
    
간결하게 쓰고 내용을 함축하는 글 습관을 고치려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미흡함이 보이는 듯 합니다. 좀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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